어릴적 살던 곳에 갔다가 찍은 사진을 동생에게 보여주었다. 어딜 것 같냐고 물었다. 사실 그곳은 동생의 친구가 살던 집이라, 반가워서 당장 눈물이라도 보일 줄 알았다. 그런데 동생은 의외로 덤덤하게, "몰라."라고 답했다. 다른 친구네를 찍어온 사진도 보여주었다. 역시나 모른다고 했다. 동네의 일부는 이미 예전과 같지 않지만, 그나마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던 곳 중에 동생 친구네가 두 집이나 있어서 찍어온건데 순간 나도 의아해졌다.
너희 친구 누구 누구네 집이라고 했더니, 순간 동생은 아주 천진한 아이의 상태로 돌아가 한참을 말이 없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느라 나름 고생하는 거라 여기니 이걸 안쓰럽다고 표현해야 할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뇌가 이런 걸 좋아해. 치매 예방에 이런 게 최고야!"
뇌는 이런 자극을 좋아한다고 했다. 공부하라고, 머리를 쓰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애써 기억해내려 갖은 힘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오른손으로 익숙하게 하던 일도 왼손으로 해보라 하지 않던가.
내가 아는 요가 강사는 근육에 가해지는 고통을 즐기라 했다. 낑낑대는 수강생들을 한 점 동정하기는커녕, 혹독하게 "더더더!"라고 외치며 한 말이다. 50대의 그 요가 강사는 요가를 업으로 하면서 아마도 스스로는 근육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조이고 어떻게 이완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한 번씩은 분명 어떤 동작으로 인해 근육이 당기거나 아팠던 낯선 체험을 해봤을 것이고 그녀는 그 낯선 고통이 싫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
뭔가에 대해 잘 안다고 여겼을 때 느껴지는 여유로움에 어떤 낯선 것들이 덧입혀지면 사람들은 긴장한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남녀끼리 서로를 탐색하며 느끼는 호감도는 크지만,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탐색에 쓰는 시간이 줄어들고 노력도 줄어든다. 심지어 '나를 좀 이해해 달라'고 호소해도, '그걸 내가 왜?' 하며 냉정해질 수 있는 게 이런 이유다. 하지만 정작 떠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떠나게 되면 그때의 뇌는 다시 사냥감을 본 사냥꾼처럼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때로는 집착이 되기도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해 좋든 나쁘든 사람을 흥분시키게 하는 일임엔 틀림없다.
"언니야,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 같아."
그 동네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보던 동생이 한참 만에 한 말이다. 동생은 단어와 숫자에 밝고 계산도 빠른 편, 새로 알게된 말들도 금세 받아들이곤 한다. 그럼에도 예전 기억을 더듬는 일이나 예전 일을 현재와 연결하는 일 만큼은 늘 깜깜이니, 나이가 들어 어떤 일을 기억하고 못 하고도 개인마다 서로 차이가 나는 일인 것 같다.
뇌에서 쓰지 않는 영역, 그곳을 써보려 애를 쓰는 일도 살면서 중요하다. 자극을 즐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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