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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눈비, 얼음비 내린 날, '바람의 집'에서..

by 비르케 2009.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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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정류장 칸막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더니 안면이 있던 분인지, 내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와 이야길 시작한다. 


"이런 눈비(Schneeregen)에 어디 가세요?"
"눈비가 아니라 얼음비(Eisregen)여!"
"그렇네, 얼음비네, 날씨 한번 참 궂지요?"

나도 멋모르고 나왔다가 이 황당한 얼음비 때문에 방금 전까지 마치 그 할머니들이랑 연배나 되는 양,
바닥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온 몸에다 힘이란 힘은 다 주고 걸어온 터다.

미끄럽고도 질척질척한 감촉이 발 밑에서 내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든다.  
차가운 얼음비에다, 귓전을 요란스레 맴돌며 옷깃을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까지 겹쳐서
한 달간의 한파가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는 일기예보에도 그저 아리송하기만 하다.

바짓자락이 바닥에 쓸려 완전히 걸레가 된 채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들어 오니,
그 얼음비도 서서히 잦아 들고, 가녀린 햇살이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몹시도 무력해 보이는 겨울 햇살 한 줄기다.

독일의 겨울은 침침한 날이 너무 많다. 


내 눈까지도 침침하다. 

지난 겨울 이러한 낯선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전에 받은 라식수술 부작용인가 걱정도 했었다.
그러던 것이, 여름이 되어 갈수록 멀쩡해 지더니, 겨울과 더불어 다시 사물이 흐릿해진다.
그러니 내가 이 곳의 겨울을 지긋지긋해 할 수 밖에.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이번 겨울에 손가락 두 개에 동상까지 걸렸다면 말 다 한 거다.
내 생에 처음으로 이름만 듣던 '동상'이란 걸 걸려도 보고, 독일의 겨울은 너무 가혹하다. 


동상 걸렸던 손가락들도 이제는 서서히 불긋한 흔적만을 남긴 채 나아가고 있고,
눈비인지 얼음비인지는 내렸을 망정, 지난 한파는 그래도 물러가고 있다 하니 그것 만으로 다행이다.

이틀 전 집주인에게 이 집에서 여름까지 보내도 되겠느냐 다시 편지를 써 보냈다.
(독일은 계약이나 해약이나 다 문서화하게 되어 있어서, 해약시에도 전화가 아닌 편지를 보내 서로 의사확인을 받는다.) 


일년 계약이 끝나는 2월말까지만 머물겠다고 이미 주인에게 통보한 바 있지만, 

동상까지 걸린 마당에, 혼자서 이 짐을 이고 지고 이사할 엄두가 안 나는 데다,
제일 큰 문제는 그간 너무 오른 집세 때문이다.


이 집 또한 내가 나가고 세를 올려 받을 수 있음에도, 집주인은 선뜻 내 편지에 오케이 답장을 보내왔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 한파보다 더 무서운 미국발 경제한파가 독일 곳곳에서도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집세를 못 내는 세입자와 집세를 받아야만 생활을 하는 주인간의 법정 공방이 사방에서 끊이질 않는 가운데, 그래도 '나' 라는 사람은 보일러를 끄고 손이 얼 망정, 집세는 제 날짜에 딱딱 내는 사람이라..


주인 입장에서는 '집세 올리기' 보다는 나 같은 '확실한' 세입자가 더 간절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바람의 집'은 겨울엔 휑할 지언정, 여름에는 서늘해 살만하기 때문에
다시 그때까지 이사는 보류되었다.

겨울...
밖에 얼음비가 내리든 눈비가 내리든, 그래도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맛난 음식이 있으니 행복하다.


새집을 구한다고 근 한달 가까이를 방황하다 보니, 그래도 내가 머물던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을 거의 다 살고 이사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억울하던 차에, 이제는 여름까지 내리 이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여름 한철 시원하게 보내고 다음 겨울은 꼭 더 따뜻한 보금자리로 옮길 생각이다.

나와 함께 집들을 보러 다니면서, 은근히 걱정하고 실망하기도 했던 애들이, 이 집에서 계속 지낸다 하니 너무도 좋아라 하는 모습에, 내  마음도 덩달아 홀가분해 진다.     

 

 유노가 그린 '나의 집'



엘리베이터 단추를 집 앞에다가 그려 놓았다.
엘리베이터 단추 옆에 있는 건, 현관 입구의
처마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라고 한다.
설명이랍시고 애써 말해 주는데,
사실 유노네 나라 말은 아직까지도
가끔 알아듣기 너무 힘든 게 사실이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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