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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적지, 남양주 가볼만한 곳 - 여유당

by 비르케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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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조안면은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다. 어진 임금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정약용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꿈꿨다. 그가 지은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이름에서도 조심하고 경계하는 삶에의 소망과 다짐이 보인다.

남양주 가볼 만한 곳 다산 정약용 유적지, 여유당

'여유당'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남을 여(餘)'에 '넉넉할 유(裕)'를 떠올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단어다. 더군다나 경치 좋은 물가에 자리한 곳이니 여유도 그런 여유가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정약용이 자신의 집에 이름 붙인 '여유당'은 도덕경에 나오는 대목을 빌어, '조심하고 살핀다'는 의미라 한다.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듯이 머뭇거리는 것, 그것이 '여()에 대한 설명이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경계하는 것, 그것은 '유()'에 관한 설명이다. 39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기'에 남긴 '여유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뒷이야기다. 

 

 

다산이 약암 이재의에게 쓴 편지인데,  목민심서가 항간에 논란이 되어 이로 인해 혹여 또 한 번 화가 닥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을 드러낸 자료라고 한다. 일필휘지를 감상만 하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구나...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그랬나 보다 하고 만다. 조선 중기부터 이어진 당파싸움의 족적만 보더라도,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살고자 했던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구쪽에 다산문화관과 함께 기념관이 있어서, 두 곳에서 다산과 관련된 자료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선왕의 기 센 신하들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신왕국을 꿈꿨던 정조를 위해 그가 화성 축조에 사용한 거중기의 모습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단순 학문만을 답습했던 학자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에 매진하며, 실제로 거중기와 배다리 조성 등에도 성과를 냈으니 팔방미인이 따로 없다. 

 

 

다산 정약용의 3대 저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도 직접 볼 수 있다. 경세유표(1817)의 '경세'는 '낡은 제도를 새롭게 해서 나라를 운영한다'는 뜻이고, '유표'는 늙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 한다. 관직체계의 개편, 인재의 고른 등용, 토지제도 개혁, 조세와 지방 행정조직 개편 등의 국가 개혁론이 담겨 있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해야 할 일과 자세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흠흠신서는 형법과 연관해 죄를 다스림에 있어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글이다. 

 

 

정약용 생가 여유당
정약용 생가 여유당
정약용 생가 여유당
정약용 생가 여유당 - 사랑채
정약용 생가 여유당 - 사랑채 처마

다산 정약용의 생가이자, 그가 '여유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의 거처다. 정계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숨죽인 채 가난한 선비로서 조용히 살고 싶었던 그였지만, 곧이어 18년간의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그에게는 형이 셋이나 있었다. 맨 큰형과는 이복지간이고, 둘째 정약전, 셋째 정양종과는 친형제간이었으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정순왕후(영조의 비)가 주축이 된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정약종은 처형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각각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다. 

 

자녀는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 다복할 것 같은 많은 자녀를 두었음에도, 2남 1녀만 남기고 모두가 그의 생전에 세상을 뜬다.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자식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며 편지를 보내던 인정 많은 아버지는 그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마침 사랑채의 문이 열려 있어서 앞뒤로 통하는 여유당의 구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사랑채에서 안채까지 연결된 구도가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시선이 오가며 가족 간에 사랑도 다져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지금의 여유당은 1986년에 복원된 것이다. 원래의 생가는 1925년에 홍수로 떠내려갔다 전한다. 사랑채에는 '여유당' 편액이 걸려 있고, 안채에는 상량문이 걸려 있다. 

 

 

안채의 뒷마당의 모습인데, 도시 촌사람 눈에는 이런 것도 신기해서 사진으로 찍어 보았다. 앞쪽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뒷마당 쪽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시골집들을 볼 일이 없어놔서 옛날 집들이 다 이런 식으로 생겼나 문득 궁금해졌다. 구석구석 돌아볼수록 재미있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집이다. 

 

 

다산 정약용 생가 앞으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조성한 '다산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은 봄꽃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아 삭막한 느낌이 들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방문한다면 틀림없이 멋진 봄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유당을 보고, 다산 정약용의 삶도 훑어보고 오니 흐르는 물도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두물머리에서 만난 남한강과 북한강이 이곳 조안면으로 들어오고, 이 물은 다시 팔당으로 흘러나간다. 사실 한없이 흘러가고 흘러들어오는 물길이지만, 물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고 인걸만 사라진 듯하다.

 

 

다산 정약용 생가 -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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