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또 하루

독일에서 시청료 안 내고 버텨보기

by 비르케 2009. 4. 23.
300x250

내게는 15인치 텔레비전이 하나 있다. 이 텔레비전은 누군가가 무료로 준다고 낸 광고를 보고 찾아가 들고 온 것이다. 하도 오래되어 보이기에, 처음엔 고장나거나 흑백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법 잘 나오는 편이다. 

텔레비전을 준 이는 이 텔레비전이 필요없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잘 보지도 않는데, 시청료때문에 자꾸만 누가 찾아오기도 하고 편지가 오기도 해서 아예 없애버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텔레비전을 건네 받아 문을 나서는 내게, 고맙게도 케이블도 가져가라며 장롱을 뒤져 케이블을 찾아주었다. 안 보고 장롱에만 숨겨둔 것임이 확실했다.

그때가 독일에 온 지 반년이 되었을 무렵이니, 얼마만에 보는 텔레비전에 감개가 무량했던 게 사실이다.
아이들도 한국에서 보던 '스폰지밥'이며, '포켓 몬스터', '유희왕' 등을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게 되니 환호성까지 지르며 좋아하더니만, 이내 며칠이 지나자 그 웃긴 스폰지밥을 보면서도 가끔은 속된 말로, 뻥찐 표정이 되어 앉아 있곤 했
다. "뭐라는 거예요?" 하고 엄마에게 쉴 새 없이 묻기도 지치는 모양이었다. 화면속에서 나대고 까불어대는 스폰지밥의 재롱에도, 아이들은 '쟤 뭐하는 거야?' 하는 듯 시큰둥한 표정이 되다가, 그나마 지금에 와서는 텔레비전을 본체 만체 하게 되고야 말았다. 나 또한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으니, 우리집에 있는 저 텔레비전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저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그럼에도 시청료를 내야 한다면? 나도 이 텔레비전을 준 사람처럼, 과감히 텔레비전을 포기할 생각이다. 없는 것 보다 있는 게 더 나은 텔레비전이지만, 다달이 내는 시청료는 우리나라와 달리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다행히도 내게는 아직까지 텔레비전이나 그 밖의 기계가 있느냐 묻는 GEZ에서의  편지가 온 적이 한번도 없고, 그곳의 직원이 내 집을 방문한 적도 아직 없다.

GEZ는 정식명칭이 Die Gebühreneinzugszentrale der öffentlich-rechtlichen Rundfunkanstalten으로, 약칭이 아니고서는 부르기 힘들, 지독하게도 긴 이름을 가진 독일의 '방송 시청료 징수기관'이다. 이 곳에서는 시청료를 내지 않는 시청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예전 내가 어릴적에 그랬듯, 가가호호를 돌며 집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있는지, 그 밖의 기계들이 있는지를 캐내고 다녀 빈축을 사고 있다.

올해 1월부터는 독일의 두 공영 방송사인 ARD와 ZDF, 그리고 도이칠란트 라디오 방송사가 안그래도 말이 많던 시청료를 또 한번 인상시켜서, 시청자들 이외에도 경제 단체들과 민간방송사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GEZ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현재의 시청료는 다음과 같다.

라디오나 라디오로 간주되는 기계를 가지고 있으면 한달에 5유로 76센트씩을 내야 한다. 이는 지금 환율로 계산을 해서 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거나 텔레비전 포함 라디오 등등의 물건을 두루 가지고 있다면 한달에 부담해야 할 요금이 17유로 98센트, 3만원이 넘어가는 액수이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말고, 그들이 표현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간주된다는 기계들은 대체 어떤 것들일까. 옆에  그림 또한 GEZ 홈에서 가져온 그림이다.

원래 GEZ에서 말하는 방송 수신 기계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만 국한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개인 컴퓨터에 TV 수신 카드가 장착된 경우까지 적용이 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면 그 컴퓨터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든 안 보든 간에 무조건 시청료를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집에 이런 기계들이 정말 하나도 없다손 치더라도, 자기 소유의 차가 있다면 차에 달린 라디오때문에 기본 라디오 시청료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걸로도 부족한지, 이제는 별걸 다 텔레비전, 라디오와 같은 걸로 간주한다.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에다, 이번엔 핸드폰이다. 요즘은 핸드폰을 이용해 인터넷이 가능하니, 그런 기능이 있는 핸드폰이 추가되었다. 또 하나, PDA를 가지고 있어도 납부대상에 포함된다.

텔레비전에 한해서만 시청료(3천원이었던가.. 참 착한 가격)를 징수하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고장난 텔레비전도 납부 대상이고, 알람용으로만 쓰는 라디오도 납부대상이니, 게다가 한번 그들의 기록에 올라가고 나면, 텔레비전을 없애고 나서 증빙서류까지 동봉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을 삭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시청자들의 원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등록은 쉬운데, 기계를 다 없애고도 해지는 쉽지 않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 이름으로도 시청료를 징수해 간다는 등등의 징글징글한 GEZ의 횡포는 이미 인터넷상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쯤 되면 독일의 시청자들도 목소리를 한번 정도는 낼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만일에라도 내 집에 GEZ 직원이 찾아온다면, 나는 싸인대신 구닥다리 저 텔레비전을 들이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져가세요, 안 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이미 수도 없이 들었을 법한 그들이 그런다고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쉽긴 하겠지만, 이 집에서 이사를 나가기 전에 누군가 필요한 이에게 주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