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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보..

보이지 않는 믿음과 약속, 카트에 사용되는 칩

by 비르케 2009.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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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고리에 달려 있는 하얀 플라스틱 보이십니까? 동전만한 동그란 부분을 떼서 사용하거나 다시 제자리에 꽂을 수 있게 고안된 이 편리한 물건은 바로 카트에 집어넣는 '동전을 대신하는 칩'입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걸 본 적은 있지만, 대개가 대형 매장의 직원들만이 가지고 다녔지요. 

독일 와서 헤매던 것 중 하나는, 수퍼에서 카트를 가지러 가는 도중, 반대로 카트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기 위해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한국에서 했듯이 동전을 내밀며, "그 카트 제가 쓸게요!" 했을 때의 반응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그러라고 하고 저의 1유로짜리 동전을 받지만, 가끔은 "칩이 들어 있어요!" 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대체 칩이라는 건 어찌 생겼으며, 어디서 사는 걸까?' 참 궁금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대형 마트 직원들 칩과는 연결이 잘 안 되던 때였지요.  

쇼핑을 위해 항상 가방에 1유로짜리 동전을 구비하고 다니는 저로서는 칩이라는 게 꼭 필요한 물건같이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간혹 급하게 동전이 필요할 때면 가방 외부 수납 주머니에 있던 1유로짜리에 얼른 손이 가곤 해서 다음번에 쇼핑할 때는 1유로짜리가 없어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쇼핑을 하느라 애를 먹곤 했으니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1유로짜리 동전을 그렇게 가방 외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보니, 언젠가는 분면 쓰지 않았는데도 동전에 없어진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어디선가 굴러떨어졌겠지요.

1유로를 잃어버리고 나니 참 아까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카트 사용시 대부분 100원짜리 동전 하나면 거뜬한데, 독일의 1유로는 한국돈으로 2천원 가까운, 카트에 넣기에 조금은 부담스런 액수니까요.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던 제 카트를, 누군가가 착각을 했는지 밀고 가버렸더군요. 조금은 황당했지요. 또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카트를 받고 1유로 짜리 동전을 주었는데, 쇼핑을 마치고 카트를 갖다 놓으면서 보니 동전이 들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더군요.그럴 때의 황당함이란... 그냥 저보다 힘든 사람이려니 생각하려 애써 보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 '칩'이란 걸  너무도 갖고 싶었던 나머지, 독일의 대형 매장인 REAL의 서비스센터에 갔습니다. 칩을 여기서 살 수 있느냐, 얼마냐고 묻는 제게, 그 직원은 말도 없이 아주 독일스런 표정(?)으로 턱 하니 칩을 내놓더군요. 얼마냐고 물으니, 무료라고 합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일일이 1유로 짜리를 챙기는 번거로움은 없었을 텐데요. 칩을 열쇠고리에 거니 언제든 편리하게 쓰이곤 합니다. 또 열쇠의 부피가 커지다 보니 엘리베이터 등의 구멍에 빠지는 일도 조금은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칩을 무료로 제공할 거면서 뭐하러 카트에 동전을 넣게 했을까? 카트를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갖다 놓아야만 자신의 잔돈을 챙길 수 있게 고안된 게 카트의 동전 넣는 곳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돈을 챙기는 것도 아니고, 칩이야 잃어버려도 다시 얻을 수 있는 건데, 그럴거면서 왜 동전을 넣게 해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트에서 보면 아직도 칩이 아닌 동전을 쓰는 사람이 더 많던데, 그렇다면 그들은 또 왜 무료인 칩을 놔두고 동전을 사용하는 번거로움을 택한 건지도 궁금해지더군요(제가 받은 칩으로 대부분 매장의 카트를 동전 없이 이용 가능했습니다). 아무데서나 그냥 마구 주는 칩은 아닌 것 같지만요.
 
결국 결론은, 카트를 가져다 놓는 데 동전도 칩도 모두 필요가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트를 보관대에 대충 밀어넣고 가버리기 일쑤겠지만, 하다 못해 칩이라도 되받기 위해서는 카트를 힘껏 밀어 넣고 쇠줄을 당겨 동전구멍이 있는 부분에 정확하게 밀어넣어주는 작업을 해야 하니 그나마 카트가 제대로 묶이기는 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칩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 벌써 반년정도가 되었지만, 열쇠고리에 붙어있다 보니 잃어버리지도 않고 편리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전이 아닌 칩이지만, 동전처럼 편리하게 사용해야 이 또한 오래 가겠지요? 동전이 아니라고 해서 카트를 가져다 놓지 않고 가버린다거나 그렇게 잃어버린 칩 대신 다시 새 칩을 받는 일이 반복이 된다면 칩의 생명도 결국은 거기서 끝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 '칩'이란 물건은 동전 대신 카트를 편리하게 이용하자는 '약속'이자, 카트를 마치 동전이 든 것처럼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는 비양심 따위는 당연히 없어야 하지않겠느냐는 '믿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곳에라야 이런 '칩'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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