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또 하루

살생부

by 비르케 2018. 5. 29.
300x250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반정을 시도할 당시, 한명회가 '생(生)과 '살(殺)'을 가르는 명부를 작성해 실세들의 생사를 결정했다. 신숙주 같은 이들은 수양대군의 편이었으니 살리고, 단종을 비호하던 김종서 등은 처참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때 그 명부가 '살생부'다.

사실 김종서나 신숙주는 연배는 다르지만, 둘 다 세종이 아끼던 신하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누군가는 어린 왕을 비호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데 앞장섰다. 젊은 날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때 찾아온 세종이 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준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사실 당대의 그 어떤 신하도 학문을 사랑하던 왕 세종을 능가하진 못 했을 것임에, 신숙주 뿐 아니라 집현전에서 밤을 새운 학자는 많았을 거라 생각된다. 밤 세워 글을 읽지 않으면 세종 앞에서 감히 자신의 뜻을 "시러 펴지 못할 이가 많았을" 테니 말이다.

왕의 공부 시간인 '경연'은, 왕이 어릴수록 신하들로부터 가르침과 조언을 듣는 자리였고, 연륜이 있는 왕에게는 오히려 이 시간이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신하들의 학문과 사상을 짚어보는 자리였다. 더군다나 세종처럼 왕이 장수를 하게 되면 신하에게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탄탄히 다져진 학문으로 중무장된 왕이었기에 분명 아는 것도 걸고넘어지고, 이치를 세세히 따졌을 테니 말이다. 그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던 집현전 학자들의 경우 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충심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집현전이 어떤 기관인가, 세종이 손수 키워낸 학문기관이다. 피로 정권을 잡은 아버지 태종의 사람들로 가득한 궁궐에서, 학문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신하들이 모여 있던 곳이 집현전이었다. 그러니 집현전 신하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신하들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대군을 일곱이나 두었다. 축복이면서도 저주였던 점은 세종의 아들들이 다들 잘난 아들들이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특출했던 이들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었다. 

왕업을 이어나갈 첫 아들이자 세자였던 문종은 세종을 꼭 닮아 학문을 좋아하고 어진 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매우 병약했다. 게다가 세종이 장수하게 되면서 아들인 문종도 함께 늙어갔다(지금 영국의 찰스황태자의 느낌이랄까..). 실제로 세종의 업적 중에 많은 부분은 문종의 업적일 수 있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세자로 있으면서 왕을 보필했거늘, 세월이 흘러 병약해졌다고 어찌 세자를 바꿀 수 있었겠는가.

왕위세습을 진행하면서도 늙은 세종은 후사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가 우려했던 이는 수양대군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느 날 집현전 학자들을 은밀히 부른다. 세종은 집현전 신하들에게 세손(단종)의 안위를 당부했고, 세종의 신하들은 충성을 굳게 약속한다. 그들이 곧 단종을 지키기 위해 죽음과 고통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육신과 생육신이었다. 그 속에 신숙주도 있었지만 그는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변절자가 되고 만다. 그런 이유로 쉽게 상하는 녹두싹을 '숙주나물'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계유정난이 있던 당일 아침, 걸출한 수양대군도 몹시 떨며 망설였다 전한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야망으로 가득한 한명회가 있었고, 든든한 학자 신숙주가 있었다. 망했으면 역적이었겠지만, 성공한 반정이라서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다. 그 과정에 살생부는 생과 사를 갈라 타인을 해하고 자신의 생을 취하는 방편이 되어주었다.

 

갑작스레 역사이야기지만, 살생부 이야기를 정리하게 된 이유는 며칠 전 읽었던 책 때문이다. 제목에 '살생부'라는 단어가 있어 섬뜩한 느낌에 집어든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살생부는 계유정난의 살생부와 다르다. 공익을 위해 살릴 부분은 살리고 소멸될 부분은 과감히 축소하자는 의미다. 조만간 또 이 책에 대해서도 포스팅 해볼 생각이다.

반응형

'하루 또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확행  (0) 2018.06.02
안전자산으로 몰리는 자금  (0) 2018.05.31
중고책 속 아버지의 사랑  (0) 2018.05.28
6월 1일, 재산세 과세 기준일  (0) 2018.05.27
자극을 즐기라  (0) 2018.05.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