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은 처음이다. 넷상에서 광고로 가끔 만나게 된 친숙함 때문인지 한 번은 보고 싶었다. 광고에서 전해지던 숨막힘을 실제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내 딸을 죽인 놈들을 없애주세요." 애원하는 눈빛에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을 그만 놓아버릴까 생각 중이던 다카토. 그는 얼굴의 절반 이상이 멍으로 덮인 채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혐오와 조롱 속에서 성장했다. 그 속에서 폭력만이 그가 살 길이었다. 방황의 끝에서 야쿠자와 엮인 다카토. 그들에게 잡히면 당장 목숨을 잃게 될 궁극의 위기에 놓여 있다. 기차가 지나는 어느 선로 위에 서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뛰어내리는 게 낫겠다 생각하던 그때, '노부코'라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부코는 다카토에게 제안을 하나 건넨다. 그 제안은 다카토가 나락과도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자면 다카토 또한 노부코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억울하게 죽은 딸의 복수를 하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다. 어차피 버리고 싶던 삶이었으므로 다카토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괴테의 극 '파우스트'에서 젊음을 택하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노박사의 위험한 거래와도 같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카토는 얼굴을 성형하고 신분 세탁을 한 다음 '무카이'로 살고 있다. 안정된 직장, 그리고 예쁜 아내와 딸, 가족 같은 동료들...

좋은 시간들은 더 빨리 지나가는 듯하다.

 

어느덧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행복을 대가로 받은 만큼 약속한 일을 치러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15년 전 노부코의 딸을 죽인 범인들이 형을 마치고 교도소에서 나왔다. 노부코의 복수를 위해 무카이가 나설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노부코가 어떻게 약속된 날에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무카이가 15년 전의 약속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가 병든 독거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노부코가 죽고 나면 지키지 않아도 알 수 없을 약속이었던 것.

 

범인들의 출소에 맞추어 편지를 보내온 대상은 이제 무카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제어하려 한다. 무카이의 어린 딸 호노카를 협박의 무기로 삼고 있으니, 약점이 제대로 잡혔다. 잃을 게 없던 과거와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헷갈리는 상황의 연속이다.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서는 무카이의 심리 상태가 안쓰러울 정도다. 

 

무카이는 자포자기 상태로 살았던 과거 속 사건이나 인물들을 향해 무작정 돌진한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상황을 너무도 소상히 털어놓는 게 독자를 더욱 긴장하게 한다.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속을 다 털어놓는 거야, 대체..)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호노카가 위험하다.

 

실마리가 풀리고 나면 긴박감이 사라지므로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이 클라이맥스를 최대한 미룬다. 클라이맥스까지 어떻게 끌고 가느냐가 관건인데, 이 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은 이 부분을 아주 잘 메꾸고 있다. 책의 전반에 살짝 등장했던 사건이나 인물들을 후반에 잘 배치했다. 그래서 독자도 무카이와 함께 혼란 속에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 독자를 허우적거리게 하고 또 어떻게 보이지 않는 대상의 실체를 파해쳐 나가는지, 편안하게 커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어느 부분은 정통 추리소설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기법상의 한계가 좀 느껴진다. 그 또한 읽으면서 직접 찾아봄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