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옛날 영화가 있다. 흑백 영화 <초우>다. 이 영화는 비 오는 날에만 만나는 한 남녀를 소재로 하고 있다. 비는 사람을 더 감성적이게 한다. 거짓에 거짓이 더해지고, 그 거짓은 더 큰 환상을 낳는다. 마치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불붙지 않는 가짜 연탄과 같다.
옛날 영화 < 초우 >, 부잣집 아들과 외교관 딸이 되고 싶었던 남녀 이야기
감독: 정진우 / 제작: 1966년
출연: 신성일, 문희, 트위스트 김
영화 < 초우 >는 한국영상자료원이 2017년에 디지털 복원했다. 1960년대 오래된 영화인데도 훼손 부분을 손보고 복원을 하니 깨끗한 화질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흑백영화라 답답한 감은 있지만, "30년을 앞서갔던 영화"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닐 만큼 소재면에서나 구성면에서 지금의 작품들과 견줄만 하다.
줄거리중 일부
프랑스 주재 한국 공사의 집에 가정부로 지내던 영희에게 어느 날 프랑스제 레인코트가 생겼다. 이 집 주인이 프랑스에서 딸에게 보낸 선물들 속에 레인코트도 있었는데, 그 딸은 사고로 이 레인코트를 입고 돌아다닐 수 없는 상태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최신식 레인코트는 이렇게 해서 영희에게로 왔다.
레인코트를 입고 비 오는 밤 클럽에 간 영희... 비싼 옷을 입은 이 숙녀를 건달들이 에워싸게 되고, 철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건달들로부터 미인을 구해내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빤한 레퍼토리지만 이 영화가 나온 1966년에는 통했던 설정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서로가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데서 공통분모를 찾기도 한다.
영희를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면서, 철수는 영희가 사는 집이 프랑스 주재 한국 공사의 집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영희는 갑작스레 허울뿐인 어마어마한 신분 상승의 기류에 올라타고야 만다. 세단을 끌고 옷도 잘 입는 철수 같은 남편을 만나 멋지게 살고 싶었던 영희의 바람과 달리, 철수 또한 알고 보면 세차원 신분에 남의 차를 몰래 끌고 나가 뭇여인들의 시선을 모으고 그중에 잘난 인연 하나 엮어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래된 영화를 보면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그 시대 전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 60년대에도 이미 서울에 고층 빌딩들이 꽤 많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서울은 서울이다.
철수(신성일)가 차에서 내려 비닐우산을 펼친다. 지금은 야채나 담는 파란 비닐과 대나무살로 만들어진 옛날 비닐우산이다. 멋지게 차에서 내려, 영희에게 씌워서 차까지 에스코트해주려 했는데 비닐우산이 힘없이 뒤집혀버린다.
영희에게 다가가는 동안 고장난 비닐우산을 뒤로 감추는 철수...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실체를 감추듯 뒤로 감춰진 우산은 철수의 손을 떠나 자연스레 도로에 떨어지고, 그가 운전하는 멋진 세단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간다.
영희가 늘 비 오는 날을 다음약속일로 잡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비 오는 날만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지금 같으면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때는 휴대전화는커녕 집전화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약속을 이런 식으로 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의 집으로 정중하게 찾아가 어른들에게 예를 갖추고 만나든가, 창밖에서 돌멩이를 던져 신호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두 사람에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둘은 허니문을 이야기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 항상 깔끔한 정장을 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연인을 바라보는 철수는 영희와의 멋진 데이트를 위해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빼앗고, 전에 사귀던 여자들에게 돈을 갈구한다.
짧은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섞어쓰면서 상대방을 속이는 두 사람 모습이 애잔하다. 자기 때문에 못쓰게 된 철수의 고급와이셔츠를 사주기 위해 영희 또한 가정부 일 말고도 세탁소에서 빨래하는 일까지를 도맡아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투잡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못할 짓인데, 그들은 그들 나름의 "미래에 대한 투자"에 여념이 없다. 그럴수록 두 사람에게 있어 종말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영화에는 계속해서 연탄불과 씨름을 하는 등장인물 한 명이 있다. 처음에 이 가게를 보며 동네 슈퍼마켓인가 했는데, 보다 보니 '세탁'과 관련된 단어들이 유리창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녀는 불을 피우면서 계속 연탄을 탓한다. 가짜 연탄들이 많아서, 갈려고 집게로 들면 깨져버리고 이제 좀 피워졌나 싶으면 꺼져버린다며 영희 앞에서 탄신 아닌 탄식을 한다.
가정부 일을 하는 영희는 장을 보러 간다고 나와서는 이곳에 장바구니와 옷들을 맡겨두고 레인코트로 바꿔 입은 후 철수를 만나러 가곤 했다. 그러니 세탁소 할머니로서는 영희가 하고 있는 가짜 행세를 눈치채고 영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일 수 있다. 물론 영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암시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물가를 알 수 있는 장면들도 등장한다. 당시에 제대로 된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50원, 혼숫감이었던 홈세트 한 벌에 15,000원이다. 그리고 서비스직 일당은 커피 한두 잔 값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커피값과 홈세트 가격과 서비스직 일당은 모두 철수의 입을 통해 안타까운 외침으로 흘러나온다.
"홈세트 살 돈, 만오천원이 필요하다." - 영희에게 약속한 홈세트를 살 돈, 만 오천 원 때문에 결국 철수는 일을 벌이고 만다. 그런 다음, 피투성이가 된 채로 영희의 발아래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초라한 자신을 감싸고 받아들여야 할 외교관 딸은 실재하지 않다.
"나는 세단 차를 몰고 다니면서 여자들 앞에서 차이코프스키를 팔아대며 50원짜리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그런 부잣집 아들이 아냐... 일당 70원짜리 서비스직 직공에 지나지 않아. 날 용서해줘."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철수의 비탄섞인 외침에 돌아온 것은 영희의 안타까운 울부짖음이었다.
"그럼 난 어떡하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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