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주말에 숲에 가기로 아이들과 약속을 했었다.
이른 아침부터 작은 녀석이 일어나라고 볼에 뽀뽀를 해댄다.
주말이라 쉬고 싶건만, 약속이라서 일어나 먹거리들을 챙긴다.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애들이 웃으며 말한다. 주말에 이렇게 일찍 나가는 건 처음이라고..
그랬었나?
하긴, 주말마다 밀린 잠을 자기에 바빴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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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 버스에서 내리니, 주점 하나가 보인다.
주점 이름이 'Linie 14 (14번 노선)'...
사실, 이곳은 10년 전 내가 살던 동네이다. 당연 잘 아는 곳...
친구들과 잔을 기울이던 기억때문에, 또 겨울마다 창문에 눈 모양 장식이 아름답던 장소이였기에,
이 주점을 보자마자 가슴 속에 너무나도 큰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아, 때로 쓸데없이 좋은 내 이 기억력 때문에 서글프다.
골목골목의 모습까지 다 기억하고 있으니..
사진 가운데 있는, 길 건너편 집이 내가 살던 집이다.
.
.
돌아서서 숲길로 접어든다.
그제서야 내가 아이들에게 한 마디 한다.
"자, 이제 준비는 됐겠지?"
"무슨 준비요?"
"오래오래 걸을 준비!"
"네, 저 걷는 거 자신 있어요!"
"저두요!"
아, 여기서부턴 진짜 허허벌판이다.
방금까지 큰소리 탕탕치던 장난꾸러기 녀석들, 입이 떡 하니 벌어진다.
그 중 한 녀석이, 여기서 살고 싶다나..
그러니 하나가 말리는 소리도 들린다.
"밤엔 무서울 거야...
봐! 가로등도 없잖아.
늑대가 나올 지도 몰라."
하하.. 앞으로도 두 아이의 상상력에 물을 붓고 싶진 않다. -_-
멀리로 트랙터 소리가 조그마하게 울려 퍼진다.
한 사람이 왔다갔다.. 뭔가에 분주해 보인다. 그래, 이곳에서도 시골은 주말도 없이 바쁜가 보다.
밀밭인가...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런 정경을 처음 본 우리 애들,
"엄마, 여기 길 맞아요?"
.
.
트랙터 바퀴자국이 풀섶을 따라 만들어낸 길을 한참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세 군데 중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는 엄마 대신 두 아이가 가위바위보를 한다.
결국 가위바위보에 이긴 큰녀석이 가운데 길을 택했다.
길을 올라서니, 햐~ 여기서부턴 온통 포도 천지다.
포도밭은 일조량에 민감해서 예외없이 가파른 경사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사는 마인프랑켄(Mainfranken)지역은 백포도주로 유명하다. 프랑켄바인(Frankenwein)..
이 지역에서 적포도주도 생산이 되나 보다. 여하튼 우리나라의 '머루포도'라 불리우는, 여름 막바지의, 엄청 강한 단 맛을 가진 포도와 외형상 흡사한 포도들도 주렁주렁 열려 있다. 맛은 모르겠지만..
이 드넓은 포도밭을 관리하다 보니, 역시나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힘들 거다.
한 쪽 자락엔 대체 어떤 기계가 지나갔는지, 포도 알맹이만 쏘옥~ 훑어 가져간 채, 나무마다 황량함만이 가득하다.
농가 앞 트럭 위에 포도 알맹이들이 하나 가득 쌓여 있다.
문득, 영화 '구름속의 산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여인들이 포도를 맨발로 밟아 으깨는 장면..
실제로 예전의 포도주는 영화에서 처럼, 밟아 으깬 후 숙성을 통해 완성되었다.
옆을 보니, 포도주 만들 때 사용되던 옛날 기구도 보인다.
아마도 위쪽 입구에다가 포도를 쏟아부었으리라, 그리고는 옆의 손잡이를 돌리면 포도가 으깨져 아래쪽으로 떨어졌겠지 ... 오랫동안 쓸 일이 없었던 듯 보이는 저 기구는 그저 장식용인 듯, 농가의 앞마당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포도밭에서 내려다 본 마인강의 모습이다. 오랜만에, 내가 이곳에 다시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어느 시에서 였나, 노래에서 였나.. 이런 구절이 있다.
'마인강 위를 지날 때면 춤을 추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는...
어느덧 다리가 아파왔다. 어른인 나도 그렇거늘, 서너시간을 중간에 쉬다가, 준비해 온 간식을 먹다가 하면서 내리 강행군 했던 녀석들이 다리가 아프다 절절 맨다. 하지만, 가도 가도 또 갈림길, 갈림길...
저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또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이 곳 길은 이런 식이다. 두 갈래중 한 길을 골라 가면 또 다시 두 세 갈래가 되고, 그 중 또 한 길을 골라 가면 또 두 세 갈래 갈림길이 되는... 이정표는 있지만, 심지어 '현재 위치' 같은 거 무시하고, 그저 산책로의 방향만 표시하고 있는 황당한 표지가 더 많다.
이쯤해서 행인을 기다리는 게 더 현명하리라 생각해 무작정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지나가는 어느 할머니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 할머니..
"여기서 차를 타고 내려가자면..."
"죄송한데, 버스를 타려구요."
순간 할머니 왠지 난감한 얼굴이 된다. 버스 정류장은 여기서 완전 멀리 있다는 것...
결국 그 중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이 있다는 곳으로 출발... 하지만 또 다시 벌판이다.
아, 그동안은 살아오면서 벌판 볼 일이 없었다. 빼곡한 건물들과 사람들 천지...
그래, 하루쯤은 이 광경을 누려보자구...
오는 길에 들국화도 보고..
.
.
.
마침내 집으로....
집을 나설 때와 달리, 어깨가 추욱 처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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