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성공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두 아들에게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고 싶었다. 어릴 때는 그 어깨 위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이 들어서는 그 어깨를 밟고 서서 구름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기를 바랐다.
프레드릭 배크만 <불안한 사람들>, 부모, 은행, 모럴 해저드
불안한 사람들(Anxious People)
프레드릭 배크만(Fredrik Backman)
초판 발행: 2021. 05월
전재산을 잃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한 사람, 돈 때문에 은행강도가 된 또 다른 사람, 은행강도에게 붙잡힌 인질들, 은행강도를 추적하는 경찰들, 그들 모두는 불안이라는 단어를 삶 속에 품고 있다. 불안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프레드릭 배크만의 <불안한 사람들>에서는 10년의 시간차를 두고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다. 한 사람은 죽음을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은행강도를 자처한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일면식도 없지만, 은행강도에게 붙잡혀 있던 인질들과 은행강도를 쫓는 경찰로 인해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간다.
1
p.80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남자가 짚고 넘어가자 은행에서는 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세상에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게 어디 있어요. 손님이 어떤 상품에 가입하는지 잘 알아보시고 저희한테 돈을 맡기지 마셨어야죠."
10년 전, 한 남자가 다리 위에 서 있다. 그는 금융전문가들이 안전하다고 했던 부동산개발업체에 투자했다. 하지만 뉴욕의 한 은행이 파산하면서 전 세계적 금융위기에 직면했고 그는 결국 전재산을 잃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막대한 빚까지 떠안게 되었다. 남자가 은행에 찾아갔을 때 은행직원은 오히려 그에게 책임을 물을 뿐, 빚을 갚기 위한 대출은 거절했다.
"이른바 모럴 해저드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군요."
곧바로 다른 은행으로 달려가 아이들이 둘이나 있다며 남자가 대출을 구걸했을 때, 그 은행의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직원은 모럴 해저드의 사전적인 뜻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하더라도 그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도록 보호하는 조치'라 한다.
p.80
"바보 둘이 빠개지려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데 나무 몸통에 가까운 쪽이 톱을 쥐고 있는 상황이라고요." 남자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박이자 그녀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설명했다. "고객님이 나무 몸통에서 멀리 앉아 있는 쪽이에요. 은행이 나뭇가지를 잘라서 자기 목숨줄을 챙기려 하고 있고요. 은행 측에서는 잃은 돈이 없어요. 고객님이 바보처럼 그들 손에 톱을 쥐어주는 바람에 고객님 돈만 날렸지."
잘린 가지를 잡고 나동그라진 고객에게 대출을 해줄 리 만무했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냐고 남자가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대출은 거절됐다. 그리고 그는 다리 위에 섰다.
p.45
부모로서 제일 끔찍한 게 뭔지 아니? 최악의 순간을 기준으로 평가받는다는 거야. 백만 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공원에서 아이가 그네에 머리를 맞았을 때 핸드폰을 들여다본 부모로 영원히 낙인이 찍히지. 며칠 동안 아이한테서 눈을 뗀 적이 없어도 문자 메시지 하나 확인 한 순간 그동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없던 일이 돼."
10년 전 그날, 10대 소년이던 어린 야크는 다리 위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가 왜 그곳에 서 있는지를 알았고, 그를 내려오게 하기 위해 말을 건다. 아들 같은 아이가 말을 걸자, 그는 잠시 야크와 이야기를 나눈다. 어린 야크는 그가 술술 이야기를 풀어가자 곧 다리 위에서 내려올 거라 단정 짓지만 그는 눈앞에서 뛰어내려 버리고 만다.
모럴 해저드 운운하던 은행직원에게 편지가 하나 도착한다. 다리 위에서의 죽음을 택한 남자가 죽기 전에 부친 것이었다. 은행직원은 편지를 차마 열어볼 용기가 없어서 10년간 그 편지를 핸드백에 넣고만 다닌다.
10년 후 야크는 경찰이 되어 있다. 경찰관 야크는 현재 은행강도를 뒤쫓고 있다. 그는 은행강도가 단돈 6,500 크로나,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강탈하려 은행에 들어간 정황에 주목한다. 그리고 10년 전 자신이 만났던, 돈 때문에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 한 남자를 떠올린다.
2
은행강도는 사랑하는 두 딸을 데려오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하필 캐시리스 은행에,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총을 들고 들어가, 그런 대단한 모험을 걸기에 결코 많지 않은 금액을 요구한다. 현금이 없는 은행이라서 은행직원이 더 도도하다. 나중에 은행강도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게 되는 '런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그 은행의 직원이다.
책을 읽으며 은행강도를 당연히 남자로 상상하며 읽었는데, 어느 순간 은행강도가 여자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상사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철저하게 버려졌다. 살던 집도 남편 명의였기에 남편과 상사가 사는 집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남편의 변호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아이들을 데려가려면 월세라도 얻으라고. 그러나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p.99
중독자들이 거짓말을 잘 하긴 해도 중독자의 아이들만큼 잘하지는 못한다. -중략- 엄마가 담배를 든 채로 잠드는 바람에 지난번에 살던 아파트에 불이 났던 일이나, 엄마가 크리스마스에 먹을 햄을 슈퍼마켓에서 훔친 일을 사회복지관에서 알게 되면 엄마와 헤어져 살 수 있다는 것도 이내 깨닫는다. 그래서 경비가 들이닥치면 아이는 엄마한테서 햄을 건네받아 자수한다. "제가 훔쳤어요." 크리스마스에 어린아이를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을 없다. 그렇게 때문에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배가 고프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녀는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엄마가 저지른 일들을 자신이 한 것처럼 거짓말하며 살았다. 엄마 없이 살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들은 절대로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데려올 돈도 없고 이제 살아갈 집도 없다. 더 슬픈 것은, 이제 아이들은 은행강도의 딸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p.96
은행에서는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에게 누가 돈을 빌려주겠느냐고 했다. 사실 돈은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한테만 빌려주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 어디서 살아야 할까? "집을 빌리셔야죠." 은행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집도 없고 직업도 변변찮은 은행강도는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대출도 안되거니와, 남편으로부터 아이들도 데려올 수 없다. 잘못은 남편이 했는데 그녀가 버려졌을 뿐. 그리고 은행직원의 말에 의하면, 돈은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이라 한다.
은행강도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월세로 6,500 크로나가 필요해서 은행에 난입했다. 그런데 어려 보이는 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캐시리스 은행이라 말한다. 게다가 진짜 권총 맞냐 묻기까지 한다. 그대로 쫄아서 사과하고 그만 나가려 했는데 이 은행직원, 신고하겠다 한다.
은행강도는 서둘러 은행을 뛰쳐나왔다가 주차단속원을 보고 놀라 경찰인 줄 알고 바로 앞 아파트로 무작정 튀어든다.
아파트에는 하필 사람들이 오픈하우스 때문에 집을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갑자기 튀어든 은행강도의 손에 여전히 권총이 들려 있었기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본의 아니게 8명이나 되는 인질 발생.
어설픈 은행강도는 끝까지 어설프다. 그런 점이 오히려 인질들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각자 개성 강한 인질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홀로 있을 때는 불안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타인을 평소보다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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