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정지하는 사고가 유독 많은 구간.
-시모키타자와 건널목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의 전말.
-'제노사이드'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신작
건널목의 유령 - 다카노 가즈아키
이 소설이 눈길을 끈 이유는 에필로그 때문이었다. 일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능숙하면서도 유려한 서술,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연스러운 묘사를 통해 사와키라는 기관사가 이끌어가는 궤도에 함께 올라탄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작가는 1964년생으로, 젊었을 때는 영화를 공부하며 촬영현장을 오갔다. 그 후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2011년 '제노사이드'로 야마다 후타로상과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이 소설 '건널목의 유령'으로 2022년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건널목과 그 근처에서 빛을 내는 신호기가 보였다. 엑스등이 하얗게 켜지며 차단을 완료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달린, 불이 꺼진 특수신호발광기가 건널목 위에 장해물이 없음을 알렸다. 그러나 장해물 탐지장치에는 사각이 있으므로 안심할 수 없었다.
때는 1994년 어느 늦가을, 단풍철도 다 끝나 승객도 많지 않은 밤, 기관사 사와키 히데오가 특급열차를 몰고 어둠 속을 달린다. 기차에 오르기 전 후배기관사 홋타와 마주쳤는데, 그가 흘린 말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요즘 인명(인명사고)이 없어요.".
새삼 조심하자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고 나아가는 사와키. 급경사와 급곡선이 연달아 이어지는 산악지대의 커브를 돌면 바로 그 요주의 구간에 들어선다. 시모키타자와 3호 건널목. 장해물 탐지장치 신호에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그다.
모든 차량의 제동장치에서 일제히 공기가 방출되는 소리가 울렸다. 열차를 급정지하고자 브레이크 파이프 압력을 제로까지 떨어뜨렸으나 비상브레이크가 먹히기 전 공주시간에 열차는 더 전진했다... 마음속으로 실루엣을 향해 '도망쳐!'하고 외쳤다. 이제 멈출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한 기관사가 인명사고와 맞닥뜨릴 확률을 계산한 적이 있었다. 그 결론은 10년에 한 번 꼴이었다. 한 번도 이런 상황을 맞아보지 않았던 사와키는 그 10년에 한 번이 지금 이 순간일 수 있음을 감지한다.
건널목에 코트 입은 중년남성이 서 있다. 열차의 제동장치가 건널목의 실루엣에 도달하기 전에 멈추지 못할 것을 그는 예감한다. 남성을 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고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에필로그는 여기까지다. 배경이 1994년이라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 부분이 회상으로 처리되나 보다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1994년이다. 일본 버블이 끝나고 사회적인 암울함이 팽배하면서 '세기말'이니 하는 단어들이 유행하던 때다.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닌, 과거 그 자체의 이야기, 이 작가의 작법이기도 하다.
에필로그가 끝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잡지사에 투고된 독자의 사진과 괴기영상으로 시작된다. 역시나 시간적 배경은 1994년이다. 그즈음 사회적인 암울한 분위기에 편승해 일본에서는 유령 이야기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때 잘 나가던 사회부 기자였지만 퇴직 후 여성월간지 기자로 밀려난 마쓰다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에필로그에 등장했던 사와키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 괜찮은데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사와키와 홋타를 어찌할 것인가, 나중에 나올 줄 알고 기억했는데 그들은 에필로그에서만 등장하는 걸로.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 마쓰다에게 심령 특집 기사 임무가 맡겨진다. 그간 아내를 잃고 거의 영혼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독자가 보낸 사진을 보며 '염사'라는 현상을 떠올린다. 시모키다자와역 3호 건널목에서 찍힌 유령의 모습은 젊은 여자다. 특집인 만큼 영능력자도 동원해 사진과 영상의 진위를 감정하기로 한다.
취재를 위해 일 년 전 사건을 쫓던 과정에서, 마쓰다는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 한 여자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시모키다자와역 3호 건널목에서 여자의 허상을 보고 기차에 뛰어들 뻔한다. 카메라 담당 요시무라가 그를 필사적으로 붙들어 운 좋게 살아나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대던 마쓰다.
전직 사회부 기자정신을 최대한 발휘해 죽은 여자에 대해 탐색하던 그는 결국 그녀의 죽음뒤에 가려진 엄청난 진실을 접한다.
여성월간지 대중들이 원하는 유령 이야기에, 전직 사회부 기자가 밝혀낸 거대한 비리까지, 특집은 당연히 성공적이라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배후에 가려진 인물이 정계 거물이기 때문.
항상 어색한 미소를 짓던 여자. 그녀의 진실을 밝히고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면서 이야기는 종결된다. 아쉬웠던 점은, 이게 모두 유령이 관여한 결과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생목이 찢어지는 소리... 이건 전적으로 현대 과학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부분. 말 그대로 유령 이야기 그 자체다.
그냥 해석하려 하지 말고 "내가 유령이야기를 읽었구나." 생각하면 된다. 제아무리 기자 아니라 형사 할아버지가 와도 이 부분은 개연성을 따질 바가 아니다. 살짝 실망한 부분이긴 하다. 사랑과 영혼에서 돌아온 남친과의 랑데뷰 장면 정도로 봐주면 될까.
에필로그와 뭔가 매칭이 되는 접점이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에필로그에서 코트를 입은 중년남자를 보고 기차가 급정거하는 부분이 있다. 그 중년의 남자는 마쓰다일 텐데, 그렇다면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 한번 더 읽어보면 해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기도, 작가의 의도를 더 잘 살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런 류의 소설은 두 번을 읽기 어렵다는 점이 미스 아닌 미스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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