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또 하루

15년된 유화 물감과 시너를 꺼내 보니

by 비르케 2023. 10. 25.
300x250
오래전에 그린 유화들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세월만큼 때가 묵은 캔버스 모서리들을 시간 내서 손볼 생각을 전부터 하고 있었다. 유화 물감과 세척액통도 열어보았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유화 물감과 시너, 15년이 지나는 동안 어떻게 변해 있을까.

유화, 오래된 유화 물감과 시너

유화의 단점은,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물감도 비싼 데다 까다롭고, 그림이 마를 때까지 장시간 늘어놓아야 해서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감이 묻으면 지우기도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 어렸을 때 모두 창고에 집어넣어버린 채 오래 잊고 지냈다.

 

오래된 유화물감
오래된 유화 물감

다행히 물감은 아직 말랑말랑하다. 그런데 물감 입구에 뚜껑이 들러붙어서 열리지가 않는다. 힘을 주어 돌리니 엉뚱하게 중간 부분에서 물감이 비질비질 흘러나온다. 있는 힘껏 짜내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림을 앞면에서 옆면으로 이어지게 그리려던 생각을 바꾸어서 같은 색 물감으로 전부 다 칠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연보랏빛으로 두르기 위해 물감을 짠다. 처음에는 전부 다 같은 색으로 할 생각이 아니었기에 물감을 조금만 짰는데, 나중에는 종이팔레트에 몽땅 짰다. 다행히 흰색 물감이 충분해서 색을 깔끔하게 낼 수 있었다.

 

유화붓이 없는 줄도 몰랐다. 알았더라면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찾다 보니 이미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게 줘버린 기억이 그제야 났다. 안그래도 물감이 안 나와서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하려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빼박이다. 붓이라고는 수채화 붓만 있어서, 버려도 될 작은 붓 하나로 다 칠했다. 물감 뚜껑을 돌리느라 고무장갑도 하나 망쳤다. 

 

 

유화 그림 옆면 칠하기
유화 그림 옆면 칠하기
유화 그림 옆면 칠하기

창고에서 먼지랑 뒹굴던 그림들의 모서리 부분이 산뜻하게 바뀌었다. 스테이플러 자국까지 커버하고 나니 정말 깔끔하다.

 

유화의 단점에 대해 말했지만, 유화는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그림이다. 일단 화사하고 고급스럽다. 고치기도 편하고, 맘에 안 들면 덮어버리고 다른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러니 하나의 캔버스 안에 다수의 그림들이 가려져 있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고 덮어버리고, 또 그 위로 그리고, 다시 덮고.. 밀레의 '만종'에서 평화롭게 기도를 올리는 부부의 발아래 바구니에 담긴 것이 원래는 감자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느니 하는 설왕설래가 가능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유화 세척액, 시너(신나)가 담긴 스테인레스 통
유화 세척액, 시너(신나)가 담긴 스테인레스 통

유화물감 세척액이 담긴 스테인리스 통.. 유화물감은 물로 씻기지 않기 때문에 붓에 묻은 유화물감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시너(신나, thinner) 등 전용 세척액을 사용한다. 그림을 수정할 때도 이런 세척액을 살짝 묻혀 지워낸다. (유화물감이 옷에 묻었을 경우에는 유화 세척액보다 샴푸나 주방세제가 효과적이다. 묻은 그대로 샴푸나 주방세제를 듬뿍 문질러 녹여낸 후 헹구면 잘 진다.)

 

 

유화물감 세척액이 담긴 통을 열기 전에 속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혹시 뭔가가 기어 나오는 건 아닌가, 곰팡이 천국이 되어 있는 건 아닌가 했는데, 세척액이 여태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장장 15년 동안 시너가 날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었을 거라고는.

 

오래전 그날 뚜껑을 마지막으로 닫기 전에 바닥에 가라앉은 물감덩어리를 크게 한 번 건져내기는 했지만, 나머지 물감 찌꺼기들은 그대로 가라앉은 채 묵어가고 있었다. 묵은지도 아니고, 된장고추장도 아닌 것이 그 긴 시간을.

 

 

유화 붓도 다 딴사람 줘버렸으니 유화물감도 당분간은 안 쓸 것 같아서 나눔 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내 맘 같아서는, 그림을 사랑하지만 물감 살 돈 없는 사람이 가져갔으면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보다 훨씬 여유 있어 보이는 분이 물감을 가지러 왔다. 아쉽긴 해도, 가져간 사람도 이 물감들이 꼭 필요한 사람일 거라 생각해 본다. 

 

그림을 그릴 것도 아니면서 오래도록 물감을 끌고 다녔는데, 결국은 이렇게 또 보내게 된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은 오래 가지고 있지 말자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유화 그림들은 손질한 덕분에 자리를 찾아 걸게 됐다. 그런데 왜 그리도 오래 이 그림들을 창고에만 두었던 것인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