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까지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날'이라는 말로 불안감을 내비치던 녀석이 결국 수능에서 평소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떤 격려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한 비장한 표정에 그냥 어깨만 두드려주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 논술전형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 거라 생각했다.
일찌감치 수시를 버리고 정시에만 올인했던 녀석이기에 수시 6장의 카드를 그냥 날려버리기가 아까워 겨우 달래서 논술 전형으로 써둔 원서였다. 그러나 막상 수능을 마친 아들은 본인이 원하는 곳이 아니면 차라리 재수를 택하겠다고 고집이다.
논술은 자신이 원하는 학과를 써낸 한 대학만 보겠다고 했다. 이렇게 확고할 거였으면 지원 당시에 그 학과를 고집할 것이지, 그랬더라면 차라리 좋았을걸.
논술전형은 따로 대비를 하지 않고는 합격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지원 당시에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던 게 분명하다. 엄마인 내 욕심에 밀어붙여 썼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부모의 욕심이 아이를 얼마나 밀어내 버릴지, 이 나이 먹도록 알지 못 할리 없으니 자식 앞에 부모인 내가 또 진다.
며칠 전부터 지원해둔 대학들로부터 안내 문자가 빗발쳤다. 코로나 19 관련 안내가 대부분이고, 당일 차량 출입 또한 통제된다는 내용이었다.
역시나 교문은 커녕, 학교로 들어오는 길목 입구에서부터 차량이 통제되어, 학생들만 내리고 차는 유턴을 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예전 같으면 교내 주차장에 주차하고 학부모들은 대기실에서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리면 됐었는데, 코로나 시국이 많은 걸 바꿔놓았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시행 중이라 여기저기 참 한산한 모습이었다. 카페도 테이크아웃만 가능하고 실내에서 마실 수는 없다고 한다. 잠깐 둘러보니 다들 편의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시험 시간은 입실부터 두 시간 가량인데, 주차 걱정에 서두르다 보니 너무 일찍 도착해서 거의 네 시간가량을 밖에서 있었나 보다. 마땅히 있을 데가 없으니 다른 학부모들도 다들 학교 여기저기를 돌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큰애 때는 본인이 알아서 진로를 결정하고 호기롭게 좋은 학교에 붙어주기까지 했으니 작은애도 당연히 그럴 거라 기대하고 있었던가 보다. 나도 모르게 찬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그렇게 추위에 떨며 아이를 기다리다가, 나처럼 아이를 데려다주러 온 어느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바가 커서 남겨보고자 한다.
그 어머니는 얼마 전에 도장 관련 자격증 시험을 보았다고 했다. 회사에서 따라고 해서 급하게 준비한 시험이었는데,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도 떨어졌다고 한다. 유성 페인트에 시너를 사용하는데, 시험 중에 시너를 작품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고 한다. 잠도 줄여가며 다른 지역까지 SRT를 타고 가서 겨우 본 시험이라 아쉬워하는 그분에게 시험관이 묻더란다.
"이렇게 되어 있으면 AS를 해야 할까요, 안 해도 될까요?"
'해줘야죠' 하는 그분에게, 시험관은 그래서 실격이라 했다고 한다.
그분은 시험에서 실격을 당한 그 일이 너무 창피해서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자신의 아이가 수능을 망치고 나니 그 마음 또한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고 했다. 완성을 하고도 얼룩 한 점 때문에 실격을 당했는데, 아이라고 어떻게 완벽하게만 시험을 볼 수 있었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오랜 시간 이 순간을 위해 공부했는데 시험을 망쳤으니, 자신의 속상함과는 비할 바도 아니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분 말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실수 때문에 시험에서 떨어진 걸 가족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엄마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수능을 망친 아이에게 비춰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게 대단하게 여겨졌다. 자신의 실수에 관대하고 아이의 실수에 엄격한 게 어찌 보면 어른들이니, 그렇게 그릇이 큰 사람이 흔치는 않을 거라 생각된다.
한사코 고사하는 내게, 그분이 따뜻한 허브티 한 잔을 대접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자신도 이렇게 차를 얻어마신 적이 있다고 했다. 좋은 이야기와 함께, 이렇게 추운 날 따뜻한 허브티 한 잔으로 마음 깊숙한 온기를 느끼게 해 준 그분이 어쩌면 잠깐 세상에 다니러 온 천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도 차 한 잔을 누군가에게 빚졌다. 그런데 그분처럼 따뜻한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줄까.
'하루 또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당팔화 수변공원의 첫눈 (4) | 2020.12.13 |
---|---|
매생이로 만드는 초간단 요리 (5) | 2020.12.10 |
한강 산책로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 (2) | 2020.11.26 |
겨울 공원의 구부러진 길 (0) | 2019.12.23 |
R.I.P 갑작스러워 더 안타까운... (14) | 2019.07.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