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글..

김광규 시인의 시 - 희망

by 비르케 2021. 6. 5.
300x250

희망이라는 말도 외래어일까, 시인 김광규는 '희망'이라는 시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빗속에 찾아온 친구와 밤새 절망의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던 것이다. 희망이라는 단어에 대해 친구는 벤야민을  인용했고, 김광규 시인은 데카르트를 흉내 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대인이라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벤야민은 발터 벤야민을 지칭하는 듯하다. 

 

 

김광규 희망
김광규 - 희망

 

김광규 시인의 시, 희망

 

이 시가 쓰였던 1980년대를 유추해 보면 민주화운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1980년대는 12·12 사태(1979)로 정권을 거머쥔 전두환 정권과 그 시작을 함께 한다. '서울의 봄'이라 일컬어지는 신군부 퇴진운동이 있었고,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광주 민주화운동도 이때에 일어났다.

 

80년대 대표 시인선 현암사 책 편집후기
<80년대 대표 시인선> 편집 후기

 

내가 소장하고 있는 < 80년대 대표 시인선 >의 편집 후기(현암사)에서 말하는 '벽두의 비극'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시작으로,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 열기가 뜨겁게 이어졌다. 그러니 김광규 시인이 이야기한 '희망'이란 것도 그 절망한 자들의 '희망을 위한 노력'의 소산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절망한 사람을 위하여 희망은 있는 것"

친구가 건넨 이 구절이 발터 벤야민의 말 그대로를 인용한 것인지, 살짝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설과 증명에 기반한 데카르트의 명제에 비해서는 생각할 점이 많은 것 같다.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유대계의 독일 철학자이자 평론가다. 그는 파시즘이 팽배하던 시대를 살다가 망명길에서 결국 죽음을 택한 비운의 인물이다. 지병에도 불구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건만 스페인 국경에서 다시 독일로 돌려보내질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다. 당시에 그런 죽음을 택했던 이는 비단 발터 벤야민뿐만이 아니었다. 예전 베르톨트 브레히트 포스팅에서도 관련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실제로 발터 벤야민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막역한 사이였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절망한 사람을 위하여 희망은 있는 것"

발터 벤야민은 유대계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반파쇼 이력까지 있었으니 그런 그에게 당시에 '희망'이라는 것은 '망명'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희망이었던 망명이 좌절되자 그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망명이라는 희망에 반대되는 말은  무(無), 가스실이었기 때문이다. 망명하지 못한 데 대한 절망이 결코 아니다. 

 

발터 벤야민의 시대가 파시즘 아래에서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였다면,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독재가 판치던 때가 서정시를 쓰기 힘들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브레히트

 

 

80년대 대표 시인선 현암사 책
80년대 대표 시인선

 

현암사에서 펴낸 이 책은 1980년대를 마무리하며 우리 문단의 대표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수록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만 보아도 당시가 브레히트가 말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와 비슷한 때였음을 직감할 수 있다.

 

고은, 곽재구, 기형도, 김광규, 김남주, 김용택, 김정환, 김준태, 김지하, 김진경, 박노해, 백무산, 신경림, 이성복, 이시영, 정현종, 최두석, 최승자, 최승호, 황동규, 황지우 등 그 시대를 대표하던 시인들의 이름이 책 앞면에 박혀 있다. 성과 이름을 붙여서 표기하는 지금과는 다른 이름표기법만 봐도 오래된 책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책 가격 5천 원)

 

 

최승자 - 밤 난간에서
 최승자 - 밤 난간에서

 

김진경 - 장난감 왕국
김진경 - 장난감 왕국

 

80년대 대표 시인선을 뒤적여본다. 일일이 선택하지 않고 얼른 펴 본 두 편의 시만 보아도, 역시나 김광규 시인이 말한 '현실에의 절망'이 바로 느껴진다. 허약한 난간에 기대어, 허약한 삶의 규율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의 알 수 없는 높이와 깊이에 관해 묻는 최승자의 시, 그리고 다음 세대는 식민의 왕국에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김진경의 시에서도, "절망한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희망을 보게 된다.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 '희망'은 무가 되었고, 80년대 시인들이 원했던 그 희망의 시간에는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다. 지금은 1980년대도 아니고, 이미 시간은 줄달음질 쳐 이 자리에 왔다. 지금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희망은 또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더 읽을만한 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던 책을 우연히 찾게 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업은 애기 삼년 찾는다고, 책꽂이에 멀쩡히 꽂혀 있던 책을 몇 년간 잃어버린 줄로만

birke.tistory.com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브레히트

시골길에서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도시에서 같으면 그렇게 마구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텐데, 나무는 가지를 뻗다가 뻗다가 아래로 아래로 굽어 땅을 향해 기고 있었다

birke.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