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여성부대 전쟁 실화가 있다. 러시아 영화, '바탈리온'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할 것처럼 호기롭게 나섰던 1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보면 남성들은 오히려 전의를 상실했고 한 맺힌 여성들이 팔을 걷어붙인다. 그 배경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시대적인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 영화가 다소 과장스러울 수 있다.
시대적 배경
러시아는 다른 주변국에 비해 중세 봉건체제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농노해방을 실현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아래로부터의 붕괴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중세 체제를 마감했던 주변국보다 잡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에 걸쳐 부농과 빈농이 탄생했고, 그들 중 빈농은 농사를 지으며 품을 팔거나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까지 겹치니 그들의 삶은 더욱 힘에 겨워졌다. 궁으로 몰려가 자신들의 실상을 알리고 개혁을 청원하려던 것이었는데, "빵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피의 일요일(1905년)' 사건이다.
이를 도화선으로, 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이 1917년 3월(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다시 들고일어나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다. 이제는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군인들까지 노동자의 편에 섰다. 이러한 혼란 속에 러시아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그해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 일가는 무참히 처형된다. 프랑스 단두대보다도 못한 죽음이었다.
영화 < 바탈리온 >의 배경
1917년 케렌스키가 주도하는 러시아 임시정부가 들어선 직후가 이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 초반에 케렌스키 집권 후 변한 일상이 마부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물가도 많이 오르고 정치범 폭력배 살인범을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세상이 시끄럽지만 새로 만들어진 경찰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등, 마부의 말 속에서 이 시기가 절대적 혼란기임을 느낄 수 있다. - 같은 해 11월(구력 10월) 또 한 번의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차지하는 걸 보면, 케렌스키 정부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해법을 내놓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러시아 재정은 1차 세계대전에 적극 가담한 결과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그토록 열광하던 전쟁에서도 밀려나 삶의 피폐함까지 더해지자 러시아군은 전투 의욕을 상실한 채 더 이상 싸우려고 하지 않게 된다. 왕정도 실각하는 마당에, 민중이 주인인 세상이 왔으니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독일군과 오히려 친하게 지내며 '너좋고 나좋자'는 식의 관계만 유지할 뿐 소모적인 싸움 같은 건 하지 않으려는 군인들의 모습이 비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에, 케렌스키 정부가 여성 부대를 창설한다. "봐라, 여성도 싸우는데.. 너네 누이가 싸운다잖아.. 넌 뭐하니" 이런 선전 효과를 노리고 여성군을 모집하게 되는데, 영화 속에서는 남편이나 애인의 복수를 하려고 백작부인을 비롯한 상류층 여성까지 군에 지원하게 된다.
영화 < 바탈리온 > 인상적인 장면들
나디아가 입대하겠다고 집을 나서자 나디아의 어머니는 프란치스카에게 빨리 잡으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정작 프란치스카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라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가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예전 같으면 상전의 명령에 이렇게 안 움직이지는 않았을 듯한 장면이다. 나디아의 어머니가 온갖 보물을 그녀에 가슴팍에 안기며 사정하는 상황이 되고서야 꼭 데려오겠다고 나서는데, 결국 그녀도 나디아와 함께 입대까지 하게 된다.
처음부터 좌충우돌하는 여군들. 왼쪽에 맞춰 정렬하라는데 한 명이 고개를 기웃거린다. 옆에 친구가 가슴이 너무 커서 안 보인다고 하자 누군가가 가슴 크기 순으로 정렬하자고 말해서 웃음바다가 된다. 갈 길이 한참 멀어 보이는 여군들.
드디어 시작된 훈련.. "전진" 상황인데 비탈길을 만나자 모두가 순간멈춤 해버린다. 사령관이 "계속 전진"을 외치자, 오합지졸로 서로 얽혀서 넘어지고 비탈을 구르는 난리를 연출한다. 저 시대 군인들의 코트, 보기에는 멋진데 비탈에서는 옷자락이 밟히는 상황도 많았을 듯하다. 추운 러시아 땅이니 긴 코트로도 부족할테지만.
한 번도 누군가를 때려본 적도, 맞아본 적도 없는 백작부인 나탈리아, 모멸감으로 울부짖으며 결국 상대를 때리고, 이를 시작으로 명령에 의해 서로가 때리고 때리는 난투극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훈련 같았는데, 이 훈련이 없었더라면 적을 향해 총칼을 들이댈 수나 있었을까.
마리아 보치카레바 사령관은 임신한 몸으로 참전하려는 부하를 달래서 집에 돌려보낸다. 카리스마 작렬하는 거구인데 의협심 넘치고 생각 외로 따스하다. 후반에 지원 요청을 할 때 하필 다른 부대에 있던 전남편과 마주친다. 맞고 살았던 지난날의 회한을 풀고 보란 듯이 복수해주길 바라게 되는 부분이다. (스포는 여기까지, 실제로 보아야 한다)
독일군과의 격전 장면, 왜 이리 안타까운 모습들이 많은지.. 지원부대는 오지 않고 긴긴 싸움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전투씬도 좋지만, 소재의 참신함에 점수를 더 많이 주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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