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 '은전 한 닢'은 그가 상해에 있을 때 본 일을 소재로 쓴 것이다. 늙은 거지 한 사람이 전장(돈을 바꾸어주는 집)에 들어와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꺼내놓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은전을 팔러 온 것이 아니라 그 은전의 상태를 알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이 가진 은전이 행여 못 쓸 물건은 아닌 것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한 번도 그런 귀한 물건을 손에 넣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은화라고 말해주었음에도 몇 번이나 거듭해 확인을 받는 거지에게 전장 주인은 훔쳤느냐고 묻는다. 거지는 아니라고 하며 황급히 달아난다. 그러면서도 은전이 잘 있나, 빠지지는 않았나 자신의 추레한 옷을 연신 더듬는다.
거지가 있는 곳으로 작가가 다가가는데도 너무나 열중해서 은전을 바라보고 있던나머지 누군가가 옆에 온 줄도 그는 모른다. 놀라는 거지를 안심시키고 작가는 거지에게 누가 그렇게 큰돈을 줬냐 묻는다. 그 말에, 거지는 자기 같은 사람에게 누가 일 원짜리 은전을 주겠느냐며, 은전을 갖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거지는 어쩌다 동냥으로 하나씩 얻게 되는 동전을 한 푼 두 푼 열심히 모아 마흔여덟 닢에 해당하는 각전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여섯 번에 걸쳐 겨우 모은 각전들을 모두 주고 그 은전 한 닢을 손에 넣게 되었다. 여섯 달 만에 이룬 일이었다.
사연을 이야기하며 거지는 그간의 고초가 생각났는지 눈물을 짓는다.
왜 그렇게까지 애써야만 했느냐는 작가의 말에, 거지는 대답했다.
"이 은전 한 개가 가지고 싶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수필의 내용이다. 작가는 그렇게까지 해가며 은전 한 닢을 손에 놓으려 반년을 고생한 거지가 매우 안타까웠을 것이다. 차라리 동냥한 돈으로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자고 끼니라도 더 챙기는 게 나았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거지가 갖고 있으면 빼앗길 수도 있고, 보는 사람들로부터 매번 의심의 눈길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거지는 평생 한 번도 손에 넣어보지 못했던 은화 한 닢을 가졌으니 밥을 안 먹어도 든든했을 것이다. 은화를 가짐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화를 입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다른 사람이 욕심을 낼 만한 값진 물건, 사활을 걸고 덤빌 만한 대단한 물건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했을지 모른다. 은전 한 닢은 거지에게 있어 은전 한 닢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작년부터 금에 이어 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 이미 많이 올라버린 금을 대신해 은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해 은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코로나 같은 재앙이 오기 전이었지만 이미 그때도 사람들의 입에서는 '유동성'이라는 단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중에 풀린 돈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값어치가 땅에 떨어진 화폐 대신에 사람들은 다른 것을 가지고 싶어 했다. 달러, 부동산, 금, 이미 올라버린 금보다는 은.. 이런 식이었다. (인베스팅 닷컴 참조- 왼:5년 차트/ 오:70년대부터 차트)
은은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 차례 급등한 적이 있다. 그 상단까지는 아니더라도 현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렇게 든든하던 은이 올해 3월 코로나가 터지면서 가격이 폭락했다. 은이라고는 했지만 금도 같은 시기에 대대적인 폭락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금은 은보다 알아주기라도 한다. 은에 비해 변동성도 덜 한 편이고, 사고팔 때도 더 유리하며, 소장이라도 간편하다. 은을 선택했던 사람들에게는 더 절망감이 드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절망하는 3월에도 또 누군가는 금과 은을 줍줍했다. 코로나 때문에 앞으로도 미친 듯이 찍어낼 종이 화폐를 더욱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1킬로그램 실버바 보다 메이플이나 이글 등 법정 은화들의 몸값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은 덩어리 값어치만 놓고 보자면 실버바로 구매하는 편이 더 유리하지만, 법정 은화는 실버바보다 큰 장점 하나를 갖고 있다. 바로 화폐 기능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집 바람이 불었기에 이글의 경우에는 한때 품절이 되어 프리미엄까지 붙은 바 있다. 은화는 화폐를 대체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수집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메이플이나 이글은 정말 탐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생전 처음 은전을 손에 쥔 늙은 거지의 행복감 또한 이러했을 것이다.
앞으로 금, 은 등 원자재 가격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지난 3월의 폭락을 아무도 점칠 수 없었던 것처럼.. 더군다나 앞으로는 종이화폐를 대신할만한 것들이 많다. 그러니 금이나 은이 앞으로의 인플레이션을 헷지할 만한 가장 좋은 수단이라며 앞으로도 더 오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쯤 해서 팔고 싶어 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금이나 은을 사고파는 데 드는 부가세가 다른 나라보다 큰 편이라 사고파는 시점에도 고민이 따른다.
다시 늙은 거지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행복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반년을 고생해서 손에 쥔 은전 한 닢을 봐도 전에 비해 덜 행복하다거나 은전이 부담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는 그 은전을 다시 각전으로 바꿀 것이다. 고생을 자초해 뭔가를 이룬 사람이니 다시 또 뭔가 다른 행복을 꿈꿀 거라 생각된다.
처음에 전장 주인에게 했듯이 어물거리지 않고 제 값을 받기 위해 얼굴도 씻고 더러운 옷이나마 단정히 한 다음 은화를 다시 각전으로 바꾸러 갈 것이다. 그렇게 은화를 주고 바꾼 각전은 소중히 간직하되 그중에 하나 정도는 동전 마흔여덟 닢으로 다시 바꿔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 먹으며 또 다른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까. 은전으로 인해 처음 맛본 환한 행복감을 결코 그냥 놓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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