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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종로서적 독일 명시선

by 비르케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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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안 볼 책이라면 이미 누굴 주거나 버리거나 중고서적으로 팔았을 테지만, 이 책은 안 볼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처럼 거처를 자주 옮기는 사람은 안 쓸 물건은 오래 갖고 있지 않는다.

 

 

 

초판 발행일은 1984년 6월 20일.

화려하지 않은 표지에, 당시 가격 3천 원.

 

전엔 몰랐었는데,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종로서적에서 나온 책이다. 책을 팔기만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출판도 했었나 보다 생각하다가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위키백과에 '종로서적'에 관해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위키백과 캡처

 

살펴보니 그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있었다.

 

구 종로서적은 2002년에 부도 처리되었고, 지금의 종로서적은 2016년 12월에 다시 설립된 것이라 한다. 자체 브랜드로 출판을 했었다는 친절한 설명도 찾을 수 있었다. 그때 나왔던 책 중에 이 책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좀 귀한 책인 듯 보인다.

 

 

 

이 책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한때 내가 좋아했던 시들이 꽤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0대 때의 나는 아이헨도르프의 낭만주의 시들을 참 좋아했다. 책에는 옛날 표현들이 많아서 1연만 다시 해석해 보았다.

 

별들은 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창가에 홀로 선 채로
멀리서 고요한 마을에 울려 퍼지는
우편마차의 나팔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몸속에서 끓어오르고
그리하여 남몰래 생각하기를,
아~ 이렇게 기막히게 좋은 여름밤
누군가 함께 여행할 사람이 있었더라면.

 

유럽에서는 예전에 우편마차가 지나면서 그 집에 줄 편지가 있을 때 나팔을 불어 알렸다. 원래는 '호른(Horn)'인데, 얼굴보다도 작은 사이즈라서 소리가 나팔소리와 흡사하다.

 

별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여름밤, 우편마차 소리를 듣고 혹시 자신에게 온 소식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쿵쾅거렸을 어느 청년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내 님이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흡사 이런 느낌 아닐까.

 

그렇게 함께 여행할 누군가를 남몰래 꿈꾸던 청년은 지금쯤?

그리고 이 시를 보며, 자신에게도 '함께 여행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수많은 독자들은?

 

손때가 배인 책이 시간을 말해준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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