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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이사, 마리 유키코 첫번째 이야기 '문'

by 비르케 2021.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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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느 아파트에 집을 보러 갔다. 공실이었는데, 도배는 새로 해서 깨끗했지만 욕실문과 욕실 스위치, 그리고 욕실 안쪽까지 유난히 누렇다는 느낌을 받았다. 싸게 나왔다며 부동산 중개사는 그 집을 내게 강력 추천했다. 전면동이라 햇빛도 잘 들고 조망도 좋아서 마음은 기울었지만 중개사가 너무나 몰아 대는 통에 한숨 돌리고 싶어 연락 주겠다며 일어섰다. 그런데 딴 데 가봤자 이런 물건 없다, 정 그러면 다른 것도 보여주겠다 계속 사람을 붙들었다. 그래도 일단 그곳을 나왔다.

 

다른 부동산에 들러서야 그 집을 계약하려던 마음을 바로 확실하게 접어버렸다. 그 집은 전에 살던 사람이 안 좋은 선택을 한 집이었다. 욕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그 욕실에서다. 

 

그 일 이후로 신축을 찾게 된다. 신축은 신생아처럼 아무런 사연이 없기 때문이다. 신축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전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 역으로, 내가 집을 내놓을 때 보면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은 대개가 집만 보지 않는다. 나를 찬찬히 관찰하고 왜 이사를 가려는지에 관해 알고 싶어 한다.

 

 

이런 경험과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책을 서점에서 발견했다. 마리 유키코의 '이사'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이사'와 관련된 여섯 편의 단편이 함께 실려 있다. 그중에  '문'이라는 소제목을 단 첫 번째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기요코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역에서 가깝고 집세도 싸서 집을 구할 당시에 보자마자 바로 계약을 했었다. 부동산 중개사들이 흔히 하는 말, "다른 분이 대기하고 있어요." 이런 류의 독촉에 떠밀려 서둘러 한 계약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강간살인범이 살던 집이었다. 이른바 사고물건(고독사, 자살, 살인 등이 일어났던 집)이었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 한 채 맺어진 계약이었다.

 

"아 여기가 그..." 라며 혼잣말을 하는 에어컨 기사,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같은건물 사람에게서 듣게 된, "예전에 604호에 무서운 사람이 살았어요"라는 말.. 결국 그녀는 다시 이사를 고민하게 되었다. '힛코시 빈보(이사를 자주해 가난해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을 새로 얻을 때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일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새집을 구하려는 그녀를 보면 그 집이 얼마나 싫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신축을 바라지만 신축이 흔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신축에 속하는 집들을 보러 다닌다. 그녀가 어찌나 재고 또 쟀는지, 부동산 업체에서 관리인을 통해 보라고 집까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벽에 난 압정 자국만 한 흠집에도 집착한다. 집을 잘못 얻어 고생했던 만큼 샅샅이 살펴보고자 하지만 관리인은 다른 할 일이 많다. 그래서 그는 꼼꼼하게 둘러보고 돌아갈 때는 관리실에 들르라는 말만 전한 채 기요코를 남겨두고 가버린다.

 

나가기 전에 관리인은 아침에 기차역에서 목격한 인신 사고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하이힐을 신고 귀에 이어폰을 낀 채로 스마트폰을 보던 젊은 여자가 특급 열차가 지날 때 빨려들어간 것 같다고, 그러면서 기요코의 굽 높은 신발을 가리키며 말한다 손님도 조심하라고. 그런 신발은 보는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한다고.

 

 

6월의 무더운 날씨.. 관리인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그녀의 오랜 악몽 속에 등장한다. 그녀가 집착했던 압정 자국만 한 구멍도 그 악몽에 함께 등장한다. 살인자가 살았던 집에 그냥 오래도록 살았어도 괜찮았을 악몽이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그다지 무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뒷부분에 있는 해설이 더 자극적이다. 실제 '문'이라는 단편은 '원령 맨션'이라 불리는 일본 모 처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이 살았던 집에 그전에 살던 강간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그 강간살인범은 피해자를 표적 삼아 다트를 던지고 놀았다고 재판을 통해 알려졌다고 한다. 기요코가 집착했던 압정 자국만 한 구멍이 다트가 꽂혔던 구멍임을 암시했던 것. 

 

주의사항에 "심약자는 반드시 해설을 먼저 읽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예전에 비해 나도 많이 심약해진 듯한데, 이 책을 읽으며 심약한지 아닌지 도전해보고 싶어서 이 책을 구매했던 것 같다. 그래도 속도 조절하면서 다음 편은 더 있다가 읽으려고 생각 중이다. 이런 책은 되도록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같은 조건하에서 읽어야 제 맛이다.

 

'이사'의 첫번째 이야기 '문'.. 이 단편은 무덥던 어느 날, 빈 집, 그것도 자신의 집이 아닌 텅 빈 공실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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