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물고 싶은 삶을 찾아서 :: 머물고 싶은 삶을 찾아서 (4 Page)

고려 명종 6년(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민란이 있었다. 공주 명학소의 '소'는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던 하층민 집단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 중 한 부류로, 소는 주로 고려 때 많았다. 이들 구성원은 천민이나 유랑민 등이었으며, 농사와 함께 수공업이나 광업 등 제조나 기술 제공의 역무까지 담당했다.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봉기하고 공주를 함락했을 때, 정부는 이미 조위총의 난(1174~1176) 등으로 무력화 되어 있던 터라, 적극적인 진압보다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당분간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재차 거듭된 봉기에 결국 군대를 파견해 토벌에 나섰고, 이에 망이·망소이의 난은 결국 진압된다.

 

 

지난 번 공주에 갔을 때, 공산성을 돌다가 망이·망소이의 난에 관한 안내 간판을 보게 되었다.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망이·망소이의 난은 차별 받던 특수 행정 구역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민란이란 점에서 일반 농민들의 난과 구별된다.

 

어쩌면 인도 카스트 제도 하에서의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대접을 받으며 '소'라는 이름의 감옥에 살았을 그들이 이처럼 봉기하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고려 초창기는 문벌(신라의 귀족층)들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당시 대표적 문벌 '이자겸'과 같은 이들이 왕실과 혼인을 거듭하며 왕 이상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정치적 혼란은 문벌 간의 분열과 세력 간의 대립을 초래했고, 이로써 무신정변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실 고려의 무신들은 개인 호위무사나 비서 같은 존재였다. 무과(당시 과거에 무과가 없었음)를 치러 정식 무관이 될 수도 없었고, 이들의 최고 지휘권도 문신이 장악했다. 그런 지경이니 당대 최고 문신 김부식이 정치도 좌지우지하고 왕명으로 글도 쓰면서(삼국사기), 민란 토벌에도 앞장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왕이나 문신들이 술을 마실 때면 옆에 선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무신들의 역무였다. 그러니 귀족 사회의 분열은 차별 받던 무신들에게 차츰 분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젊은 문신이 나이 지긋한 무신의 뺨을 때리고, 무신의 수염을 재미로 태우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무신들은 결국 문신이라면 씨도 남기지 말고 제거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게 된다. 이것이 무신정변(1170)이다.

 

그러나 힘으로 얻은 권력은 자꾸만 찬탈 당하게 되고, 최충헌을 필두로 한 최씨 정권이 들어설 때(1196)까지 권력 쟁탈은 지속된다. 이 권력의 중심에는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도 있었으니,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가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천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당시는 이의민이 복위를 꾀하는 의종을 살해하고 대장군으로 활약하던 때였다.

 

무신 정권은 100년간 지속되며 무신들의 세상을 이어 나간다. 중앙 통제력이 상실되면서 사회 갈등이 심화, 분열되고 백성들은 세금 수탈에 신음했던 때, 누구든 신분 상승의 꿈을 꿔보던 때, 공주 명학소 망이·망소이의 난 또한 세상을 향해 부르짖핍박 받던 천민들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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