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되니 그리워지는 다관 하나, 찻잔 한개

얼마전 패트릭 스웨이지가 그리 많다 할 수 없는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주연한 '사랑과 영혼', 보신 분들은 누구와 함께 보셨나요? 죽어서도 연인을 떠나지 못 하는 줄거리 특성상, 연인이나 이성 친구와 많이들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때의 기억들, 아마도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고 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요. 그래서 패트릭 스웨이지의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더욱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 아픈 나머지, 어느 날 미완으로 끄적여 둔 패트릭 스웨이지에 관한 기억을 포스팅해볼까 하다가, 그냥 그 즈음 떠오르는 다른 기억에 대해 대신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당시, 저는 대학 후문 앞 전통찻집에서 겨울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마다 친구들 얼굴도 못 볼 정도로 아르바이트에만 매달려 지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많은 아르바이트 중에 가장 행복했던 아르바이트가 바로 그곳, 전통찻집에서의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같은 일인데도 그곳의 손님들만은 전에 일하던 곳의 손님들과 뭔가가 달랐습니다. 반듯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자세, 자기 돈 내고 먹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예의바름, 한 쪽에서는 장기나 바둑을 두던 풍경들... 손님들 뿐 아니라, 주인언니도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돈보다는 우리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게 좋아 그 일을 택한, 어린 저로서는 참으로 하늘처럼 높아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거기서 거기인 음료값을 받고 차를 팔아도, 커피나 주스를 파는 것과 식혜, 수정과, 모과차, 유자차 등 우리차를 파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메뉴들을 직접 만들어 장사했으니, 원가는 더 들면서 힘은 배로 들던 일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저도 서빙만 했던 것이 아니라, 언니를 따라 모과 썰고, 유자 썰고, 때로는 녹차떡(손님상에서 차를 우려낸 녹찻잎을 모아 떡을 만든 후,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대접하곤 했습니다) 만드는 것도 도와야 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하늘같기만 한 언니가 하는 일이었기에 제게도 나름 즐거웠던 노동이었습니다.   

제가 힘들게 일하면서도 그리 즐거웠던 이유는, 전술했던 바대로 언니같은 대단한 사람을 만난 때문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차(茶)와 도기(陶器) 때문이었습니다. 날마다 하는 일이 대개 차 만들고, 도기를 만지는 일이다 보니, 차도, 도기도 마냥 좋았습니다. 

뚜껑 손잡이가 깨진 다관(차 주전자)이나 이가 나간 숙우(찻물을 식히는 그릇)등은 어느샌가 저의 차지가 되었고, 집에는 차츰 여기저기 성치 않은 도자기들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찾아온 친구들은 늘 소꿉놀이를 하듯 한 쟁반 가득 차려진 다구들(다관, 숙우, 찻잔, 차받침, 대나무 차술(차를 더는 도구), 다포(차 쟁반에 까는 천) 등)로 차 대접을 받곤 했지요. 지금은 커피를 줄여야 할 정도로 많이 마시고 있지만, 그땐 차를 하루에도 찻잔으로 20여잔은 족히 마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큰맘 먹고 장만했던 다기세트는 하나둘 깨지고 종적을 감추다, 지금은 다관과 찻잔 한개만이 제 옆도 아닌 고향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월을 되짚어 보면, 제가 그 다기세트를 사서 애지중지하기 시작했던 게 벌써 2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지금으로 부터 10여년 전에는 저를 따라 독일에도 왔던 다기세트인데, 지금은 찻잔이 달랑 한개라 옛집에 그냥 묵혀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을이 되니 이 다관과 찻잔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무지 보고 싶습니다. 한국 녹차도 마시고 싶구요.

유럽쪽 차는 선물로 사서 가져갈 정도로 질이 좋다고는 하던데, 세 봉지의 차를 그저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의무적으로 마시고 있을 뿐입니다.

그중에는 녹차도 있는데, 제 입맛에는 그 또한 우리나라 녹차가 더 낫더군요. 아마도 오래도록 입맛에 길들여진 탓이겠지만요.

패트릭 스웨이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돌아보니, 그의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던 그 즈음에 전통찻집에서 도기를 어루만지던 한 소녀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그때 그 소녀가 큰맘먹고 들여놓은 다기들은 하나 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지 오래... 남은 다관과 찻잔 하나도 지금쯤 컴컴한 박스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겠네요. 

그리운 다관과 찻잔은 옆에 없지만, '친환경'이란 딱지가 붙은 독일 녹차를 스테인레스 거름망에 걸러낸 후, 예전에 마시던 녹차를 떠올리며 애써 마셔가는 중입니다. 그때처럼 지음(知音)이 곁에 있으면 더없이 좋으련만, 혼자라도 가을 분위기 맘껏 내며 차를 마시곤 합니다.    

여러분은 이 가을 어떤 차를 마십니까?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가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