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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여신 - 히가시노 게이고

by 비르케 2024.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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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여신 -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녹나무의 여신>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녹나무의 파수꾼>을 빌리게 된 게 두어 달쯤 전. <녹나무의 여신>은 <녹나무의 파수꾼>의 속편이었던 것이다.

 

<녹나무의 파수꾼>에서는 주인공 레이토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녹나무가 있는 월향신사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또 녹나무의 비밀이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가 펼쳐진다.

 

삶의 나락의 목전에서 레이토 앞에 나타난 그의 이모 야나기사와 치후네. 처음으로 알게 된 이모의 존재로 레이토의 인생에도 햇살 같은 밝은 빛 한 점이 드리워진다. 녹나무 파수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처음의 치기 어린 모습의 레이토는 점차 의젓하고 배려심 많은 청년으로 바뀌어간다. 

 

 

녹나무의 여신

월향신사의 녹나무는 혈연관계인 사람 간에 염원을 전달하고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영험함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녹나무에서 털어놓는 사연들이 훗날 수념하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속편인 < 녹나무의 여신>에서는 중학생 모토야가 스스로를 위한 예념을 하게 된다. 모토야는 뇌종양 수술 이후 단기 기억상실에 빠진 채, 잠을 자고 나면 전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행을 안고 있다. 수술 전의 일들은 다행히 기억하고 있어서 과거와 현재 간의 시차로 힘들어한다.  세월이 흘러 죽음 앞에 선 그는 자신이 남긴 기억을 스스로 수념하며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레이토가 모토야를 만나게 된 것은 치후네가 참석하는 인지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서다. 치후네는 야나가사와 가문을 이끌어가던 강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찾아든 인지장애는 그녀에게 뜻하지 않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저녁에 요리하려고 사온 방어를 무심히 바라보는 그녀, 자신이 그것을 사 왔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멍한 눈동자다. 그뿐이 아니다. 방어요리를 하려는데 도무지 어떻게 만드는 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레이토는 이모인 그녀를 안심시키려 방어요리를 검색해 함께 요리를 한다. 방어무조림에 들어갈 무를 전자레인지에 미리 익히는 방법을 새로 알게 된 것을 두고, 차례차례 잊어간다는 일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 스스로 위안 삼는 그녀.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그 속에서 뭔가 좋은 점을 찾으려는 평소 강인하고 지혜로운 치후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노년의 무력감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녀다. 

 

 

인지장애를 겪고는 있지만 평상시 늘 강인하고 지혜로운 모습이던 치후네가 조카인 레이토에게 당부한다. 레이토는 무단침입, 절도미수, 기물파손등의 혐의로 기소 위기에 놓여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은 레이토를 바로 용의 선상에 올렸다. 행여라도 레이토가 스스로를 방관하거나 비관할까 걱정하는 이모로서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당부다.

 

살인사건의 전말은 유키나라는 학생이 자신의 시집을 팔기 위해 월향신사를 찾는데서 시작되었다. 집이 가난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조잡하게 엮은 시집을 팔러 온 것이다. 

 

시를 쓰는 유키나, 그리고 인지장애 때문에 그날그날의 일을 꼬박꼬박 기록해 두는 모토야, 거기에 레이토까지 합세해 세 사람은 특별한 일을 기획한다. 함께 책을 쓰는 일이다.

 

 

유키나와 모토야 두 사람이 쓴 글에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현재의 고통이 너무도 크게 여겨진 나머지 미래를 보여준다는 여신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영험이 깃든 녹나무의 여신을 만난다.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달라 부탁하는 소년... 그러나 10년 후의 자신은 지금처럼 '미래를 보여주는 여신'을 찾고 있다. 20년 후의 자신도, 30년, 40년, 50년 후의 자신도 여전히 여신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신이 말한다. 

 

"몇 년이 흘러도 인간은 언제나 길을 찾아 헤맨다."

"곧 다가올 앞날에 대한 불안이 사라져 없어지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세 사람이 쓴 글이 책이 되어 나오고.. 레이토는 그동안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 치후네를 찾는다. 이제는 레이토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치후네.

 

순진한 소녀의 얼굴로, "재미있겠지요?" 말하는 치후네를 바라보며, 레이토는 예전에 이 책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낭독해 주던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눈에 눈물이 맺히던 그날의 치후네를.


추리작가여서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도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언젠가부터 작가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날카롭고 짜임새 있는 추리보다는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서사로 바뀌어가는 듯하다. 살인사건은 있으되, 그것을 파헤쳐가는 것은 형사들일 뿐. 제목도 그렇고 플롯도 온기가 느껴진다. 더군다나 세 인물이 쓴 글도 다분히 동화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런 느낌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고 싶었다. <녹나무의 파수꾼(2020)>이 2020년 3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여러 나라에서 동시출간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속편인 <녹나무의 여신(2024)> 또한 이어서 읽어보기로 맘을 먹었었다. 한국인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일본 작가인 만큼 <녹나무의 여신> 또한 일본과 한국에서 올해 동시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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