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 히가시노 게이고
낮에는 누구나 찾을 수 있지만, 밤이 되면 예약된 손님들만 접근할 수 있는 오래된 나무. '기념'이라 불리는 한밤의 일정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매번 손님을 맞이하고 밀초를 준비하며 의식이 끝날 때까지 녹나무의 파수꾼이 모든 것을 챙긴다. 숲 속에 홀로 지내야 하는 외로운 일이라 나이 지긋한 사람이나 할법한 이 일을 새로 맡게 된 레이토.
레이토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할머니에게 의지해 자라났다. 독립할 때가 되자 중고 공작기계를 취급하는 회사에 다니며 그곳에서 제공한 사원 기숙사에 기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고 당연히 기숙사에서도 나와야 했다.
남은 월급도 받지 못한 데다 오갈 데도 없게 되자 레이토는 너무도 분이 나서 다니던 회사에 무단칩입한다. 값나가는 기계라도 훔쳐오자는 생각이었는데, 경고음이 울리게 되고, 그 소리에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기계마저 떨어뜨리고 만다. 그 일로 인해 결국 무단침입, 절도미수, 기물파손 혐의까지 뒤집어쓰고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꼼짝없이 감옥에 가겠구나 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레이토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제안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월향신사의 녹나무를 관리하는 일. 그렇게 해서 레이토는 녹나무의 파수꾼을 맡게 되었고, 점차 녹나무에 깃든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에 주목하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세 명의 인물이 도둑질을 하고 도망치다가, 차가 서버린 바람에 과거 잡화점이었던 폐가에 몸을 숨기게 되면서 시간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됐던 것과 비슷한 설정이다.
젊은 나이에 범죄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레이토를 구해준 이는 야나기사와 치후네. 레이토의 엄마와 이복 자매지간으로, 레이토가 이제껏 존재를 알지 못했던 그의 이모다. 나이 차가 많은 이복 여동생과 서로 간에 미움의 감정을 품은 채 오랜 세월 연락 없이 지내다가, 나이가 들고 차츰 자신에게도 노년의 병이 찾아들기 시작하자 어린 여동생과의 일들을 다시 되뇌는 치후네다.
부모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온 레이토가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일마저도 동전을 던져 결정하는 모습에, 이와모토 변호사가 한 마디 조언을 한다. 살아오면서 듣지 못했던, 어찌 보면 부모가 있는 이들에게는 잔소리 같은 말들에도 예의 바르게 수긍하고 자신을 고쳐가는 모습의 레이토.
일하던 곳의 사장이 레이토를 두고 '결함 있는 기계'에 빗대 악담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이 틀렸음을 보여주라는 이와모토 변호사의 당부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치후네 또한 레이토에게 사사건건 예의범절을 가르치려 들지만, 그런 이모의 가르침에도 고분고분 따르는 레이토. 그러면서 그녀의 편에 서서 야나기사와 사람들과 당당하게 맞서기도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작을 하면서도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을 내놓았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 작가답게 중간중간 등장인물로 하여금 사건이나 인물을 분석하도록 설정한 부분들이 있다. 그의 추리소설은 혐오나 엽기보다는 휴머니즘에 더 가까웠던 것 같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난다.
영험함을 가진 오래된 녹나무를 찾아 혈육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을 풀어나가는 모습들도, 가망 없어 보이던 레이토가 능력있는 이모를 만나 책임감 있고 정감 있는 캐릭터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야기의 모든 결말도 훈훈했다.
이 책의 속편, '녹나무의 여신'에 앞서, 전작인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고난 느낌. 그냥 편하게 읽을만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0년대 작품들, 이를테면 백야행(2001), 방황하는 칼날(2004), 용의자 X의 헌신(2006), 유성의 인연(2008) 같은 소설들이 더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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