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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못난이 다관을 보며..

by 비르케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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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때였나,

학교 앞 전통찻집에서 알바를 했다. 

당시에는 '알바'라는 이 약어도 당연히 없었다. 

아르바이트.

일상 속 외래어 중에 몇 안 되는, 독일어에서 온 외래어다. 

정작 독일에서는 '공부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존재한다. 

"이히 아르바이테(Ich arbeite)..."라고 할 때는 한국말이 그렇듯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일한다는 것인지, 공부한다는 것인지..

하지만 이때 공부도 그냥 공부는 아니다. 

대학에서 하는 연구 비슷한, 일만큼이나 골치아픈 공부를 지칭한다. 

 

어쨌든 나는 그때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전통찻집의 사장님은 나와 나이 차이가 거의 5살 정도밖에 안 나는, 같은 20대 언니였다. 

언니는 차탁 몇 개로 시작해 가게를 넓혀가던, 지금 생각해봐도 참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언니의 영향을 받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녹차뿐 아니라 홍차, 오룡차, 다양한 과실차들..

 

월급을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다구를 갖추는 일이었다. 

다관, 숙우, 찻잔 3개로 구성된 세트를 샀다. 

우스운 건, 세월이 그렇게나 지났건만,

다구는 그때도 지금 가격이었다는 점이다. 

 

수십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차를 내줬던 다구는

서서히 이가 나가고 깨지고...

 

 

그러다 이제서야 문득 본다. 

그때는 이뻤는데, 못난이가 되어버린 다관...

요샌 예쁜 그릇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간에 못난이 다관은 찻잔을 모두 잃었다. 

차를 내주는 주인이 얌전해도 

차를 받는 손님들이 험하면 남아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세월이 장장 몇십 년이니..

 

이 다관이 못난이로 보이는 또 다른 이유,

주둥이가 너무 낮게 달려 있다. 

물을 가득 채우기도 전에 주둥이에서 물이 쏟아진다.

그래서 3인용이지만 세 개의 찻잔을 채워본 적은 없다. 

 

 

지금 내게는 새로 마련한 한 세트의 다구가 더 있다.

이번 꺼는 제대로다. 

사진이 자세히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물이 아주 가득 찼다. 

 

다관에 물이 그득히 차기 전에 절대로 주둥이에서 물이 넘치지 않는다. 

내게 뭔가 큰 암시를 주는 듯한 다관이다. 

 

못난이 다관은 젊은 날의 모습을 닮았다면

지금 내가 쓰는 다관은 앞으로의 내 모습에 대한 힌트 같다. 

 

못난이 다관...

 

차기도 전에 넘치는 다관이지만

그때의 나는 다관에 대해 잘 몰랐고

그럼에도 그것을 택했고 오래도록 사랑했다.

그래서 못났지만 지금도 버리지 못한다. 

찬장 한 구석, 내 젊었던 날의 흔적으로 남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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