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인해 열차가 연착된다.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몇몇은 졸고, 쿨럭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톱밥 난로에 둘러선 채로 말 없는 사람들.
오랜 기다림과 추위에 지쳤을 법하다.
가끔 톱밥 한 줌을 던져 넣으며 화자는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의 사평역은 실제 존재하는 역이 아니다.
9호선 사평역이 생기기 한참 전 1981년 작품이니, 전철역 사평과도 거리가 있다.
전라도 화순에 '사평'이라는 지명은 있다.
그러나 그곳에 역은 없다.
내가 어렸을 적에 화순 사평에 어른들을 따라 물 맞으러 갔던 기억이 있다.
등이나 허리에 통증이 있던 사람들이
폭포수 아래 선 채로 거세게 떨어지는 물을 맞던 기억..
온몸이 벌게지고 러닝셔츠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물을 맞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처럼 마사지기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니, 실컷 등허리를 두들겨주는 물줄기가 시원했나 보다.
남쪽이 고향인 시인이지만, 그 사평과도 연관이 없어 보인다.
톱밥 난로도 낯설다.
톱밥을 한 줌씩 넣어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난로인가 시에서 힌트를 얻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좋았다.
이 시를 떠올리면 영화를 보듯 장면 장면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톱밥 한 줌을 던지는 화자처럼,
읽는 사람에게도 그리웠던 순간들이 떠오르게 만든다.
예전 기차역은 누구를 마중하고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기차에 올라서도 으레껏 옆 사람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묻다가 친해지곤 했었고..
중간에 먹거리를 가득 실은 판매 카트가 지나가고..
부시럭 부시럭 집에서 가져온 간식들을 먹기도 했다.
중간쯤 가다가, 기차에서 내려 우동을 먹을 수 있는 역도 있었다.
10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동가게 앞에 선 채로 머리를 숙이고 우동을 먹던 사람들..
그때도 어릴 때였는데, 내리지 않고 차창으로 그 모습을 보던 기억이 있다.
떠오르는 정경마다 참 따뜻하다.
예전 이 시를 좋아했던 때보다 세상은 엄청 편리해졌다.
그때처럼 기차가 잦은 연착을 하지도 않고, 어쩌다 연착은 환불이나 쿠폰으로 보상도 해준다.
연착이라니, 오히려 세상은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다.
KTX, SRT, GTX, EUM .. 기차도 이제는 속도로 말한다.
그리고 속도로 인해 짧아진 심리적 거리에 대해 말한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사평역에서'를 읽는 오늘 내 마음은 아직 옛날 대합실에 있는 듯하다.
시에 나와 있지 않은 장면까지 상상을 다 하고 난 후다.
사평역에서.. 이 시가 이렇다.
읽을 때마다 옛 기차역의 추억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그래서 겨울이면 더 생각이 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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