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에 입주할 때는 웬만하면 옵션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하자 때문이다. 아무리 최고 브랜드의 아파트라 할지라도 하자 없이 완벽할 수만은 없다. 디자인이나 마감재가 맘에 안 든다고 맘대로 바꿨다가 만의 하나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아파트 시공사의 책임 소지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주방을 뜯어고친 경험이 내게도 있다. 구조의 편리성을 버리고 전면동의 채광과 뻥 뚫린 조망을 우선으로 택해 프리미엄까지 얹어주며 마련한 새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 타입들 중에 유독 내가 고른 타입에 최악의 맹점이 있었다.
"새 아파트인데? 냉장고 자리가 없다고?"
냉장고 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냉장고는 대체 어디에다 둬야 할까? 더군다나 우리집에는 양문형 냉장고가 두 개나 있었다. 새 냉장고와 함께, 십 년도 넘은 누런(?) 홈바 달린 냉장고까지, 자그마치 두 개의 냉장고 중에 한 개도 둘 데가 없으니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입주지원센터에 물어보니, 거실 옆 공간이나 주방 베란다에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방 베란다가 애초부터 냉장고 자리였는지, 물기가 안 닿게 단을 더 높여 두었다. 공간의 왼쪽에 붙이든 오른쪽에 붙이든 맘대로 하라는 듯, 콘센트도 이쪽저쪽 두 개다. 아니 그보단 일반 냉장고든 김치냉장고든 요새 냉장고가 둘인 집이 많으니 두 냉장고를 다 집어넣으란 소리인가도 싶었다. 그런데 냉장고는 그냥 네모난 박스가 아니다.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유격을 감안하면 두 대는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소파 공간 옆에다 냉장고를 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될 것 같았다. 오래된 냉장고는 베란다에 내놓고 새 냉장고만 이곳에 세워둔다 하더라도, 편히 쉬어야 할 소파 옆에서 냉장고가 돌아가다니, 그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두 대의 냉장고는 어디로 갔어야 할까요?)
그날은 사전점검 날이었는데, 고민만 하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그럭저럭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게는 나름 과감한 선택이었다.
이 분들을 불렀다. 나의 결론은, 싱크대 상·하부장 일부와 대리석 상판을 잘라낸 다음 냉장고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 주문대로 나의 고결한(?) 대리석 상판이 반토막이 난 후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어버린 것.
아저씨들이 웬만한 공사는 마무리하고 주방 TV의 위치를 옮겨달고 있다.
싱크대를 떼어내고 난 자리가 허전하다.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저렇게 생겼었구나.. 싱크대에 못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박히는지도 가늠할 수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원래 있던 게 사라지니 이런저런 흔적도 함께 남았다. 타일도 필요한 만큼만 붙어 있고, 천정도 원래 있던 형태 그대로 남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또 지나 드디어 냉장고장이 완성되었다. 공사하신 사장님이 센스 있는 분이시라 기존에 있던 수납장을 버리지 않고 활용할 수 있도록 베란다에다 따로 빼주셨다. 그리고 수납장 문을 떼서 자른 다음, 냉장고장 위에 유용한 공간도 만들어 주셨다. 주변 색과 조금만 달라도 색상이 바로 들뜬다고 하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목재라서 새로 했는데도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듯 옆에 수납장 문들에 자연스럽게 묻혔다.
그런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냉장고장 뒤쪽 타일이 시공되다 만 것 같은 벽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부장 사이즈만큼 마루가 시공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루 시공이 안 되어 꺼져있는 시멘트 부분을 뭔가로 메꾸는 일은 난제였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입주지원센터에서 시공 사장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타일을 시공했던 사장님이 오셔서 몇 시간 내내 공사를 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그간 입주도 했다. 입주한 상태에서 냉장고만 냉장고장으로 들어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싱크대 하부장 사이즈만큼만 시공하면 될 것 같지만, 조각이 끼워지는 형태를 맞춰야 하다 보니 거칠게 잘려나간 부분들을 일일이 다 뜯어내고 다시 시공해야 했다.
드디어 냉장고장에 냉장고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냉장고는 베란다에 있는 수납장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냉장고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없어져버린 수납공간은 베란다에 대신 만들어졌다. 냉장고가 들어가고 수납장이 베란다로 나온 것이다. 냉장고장을 짜주신 사장님이 저렴한 자재로 짜준 싱크대였다.
시공이 완료된 전체 사진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과정을 포스팅을 할지는 생각도 못해서 따로 찍어두지 않았다. 그나마 위의 사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냉장고장 시공비랑 베란다의 싱크대, 마루 시공까지 모두 합쳐서 백만원 남짓정도 들었다. 열심히 견적을 본 결과 저렴하게 매긴 가격이고, 지금으로부터 한 7년쯤 전 가격이라 참고만 했으면 한다.
냉장고를 둘 공간을 만들고 나니 정말 유용했다. 냉장고장이 없는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이 집을 택했던 이유, 앞서 말했다시피 조망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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