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원작 소설 출판 이래,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고 국제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몇 년 전에는 애니메이션으로, 또 리메이크 영화로도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동명의 영화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원작: 다나베 세이코(田辺聖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 - 1984)
감독: 이누도 잇신
장르: 로맨스, 멜로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妻夫木聡: 츠네오 역), 이케와키 치즈루(池脇千鶴: 조제/ 쿠미코 역), 우에노 주리(上野樹里: 카나에 역) 등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7분
이 영화의 제목 '조제,호랑이, 물고기들'은, 여주인공인 조제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보고 싶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녀는 혼자서 호랑이를 보러도, 물고기들을 보러도 갈 수 없는, 장애로 숨어 사는 소녀다.
영화는 츠네오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그리움으로 남은 조제, 그럼에도 만날 수는 없는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그녀를 만나던 날을 떠올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늦은 밤 아르바이트 중인 츠네오, 손님들의 대화 속에 우연히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해뜨기 전 유모차를 끌고 나온다는 노인... 노인의 기행은 오래전부터라고 한다. 다들 그 유모차에 뭐가 들어있을지가 관심사다. 누군가는 보물이 들어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약이라느니...
그리고 츠네오는 급기야 그 노인을 만나게 된다. 언덕에서 급하게 굴러오는 노인의 유모차에는 어이없게도 한 소녀가 타고 있었다. 다리를 쓸 수 없는 소녀,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녀가 '조제'다.
조제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 (Dans un mois, dans un an)'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이 책에 탐닉한 나머지, 조제가 자기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가 탄 유모차를 끌던 노인, 조제의 할머니는 그녀를 '쿠미코'라 부른다.
길 가던 청년의 신세를 졌으니, 노인이 츠네오에게 밥을 먹고 가라 청한다. 그렇게 이 집에 츠네오가 드나들게 된다. 밖에서 유리창만 두드리면 조제가 창문을 여는 집구조라 연애하기 좋다고나 할까.
조제는 어릴 때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걸을 수가 없다. 커가면서 점점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고, 할머니는 밖에서 책만 보이면 그것이 어떤 책이든 다 주워다가 조제에게 갖다 주곤 했다. 방에 책이 가득하다. 책 속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조제... 그러나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이 더 궁금해져 가는 그녀다. 그런 손녀를 위해 할머니가 고안한 방법이, 남들 다 자는 밤에 유모차를 끌고 나가는 것. 이런 손녀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세상살이의 고통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듯한 조제의 억양이 특이하다. 할머니와만 살아서일 수도 있지만, 목소리의 톤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눈빛도, 어쩐지 나이와 걸맞지 않게 달관 그 자체로 보인다. 이런 부분은 연기자의 몫인데, 여주인공의 연기가 참 능숙하다.
츠네오가 이 집을 자주 찾게 된 이유 중 하나, 할머니와 소녀가 만든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기 때문이다. 조리대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음식을 만드는 조제, 음식을 다 만들고 내려올 때는 아래로 철퍼덕 뛰어내리곤 해서 옆에 있던 츠네오를 놀라게 한다. 다리에 감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보는 사람으로서는 뼈 어딘가가 부서질 것만 같은 동작이다. 츠네오가 이 광경에 대해 카나에에게 이야기하면서 다이빙에 빗대는데, 결국 그 표현으로 인해 조제의 분노를 사고 만다.
조제의 아픔을 방관할 수 없는 츠네오... 할머니는 그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몸이 불편한 손녀를 일반인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할머니로서 마음이 찢어지겠구나, 할머니 말대로 두 사람이 더 이상 안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내 마음도 달라지게 했다.)
이미 시작되어 버린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 사랑이란 게 영원할 거라는 건 바보들의 생각이다. '영원'이라는 걸 전제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에 빠졌던 조제는 사랑을 시작하면서도 이별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츠네오에게 맘껏 어리광을 부린다. 츠네오의 등에 업힌 채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피곤하게 해서 츠네오가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 따위는 애초에 없다.
츠네오를 통해 새로이 보게 되는 세상... 다리가 불편할 뿐인데도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마저 감고 있었고, 들을 수 있는 귀마저도 막고 살았던 그녀.. 그래서 맘껏 보고 듣고 만져보는 그녀다.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닷속,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그랬구나, 조제는 해저에서 살았구나."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어. 바람도, 비도 없어. 정적만이 있을 뿐."
"외로웠겠네."
"별로 외롭지 않아. 첨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천천히 시간만 흐를 뿐이야."
그녀가 말을 잇는다.
"난 다시는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바다밑을 굴러다니겠지. 뭐 그래도 괜찮아."
그리고 결국 그날이 온다. 둘은 각자의 길을 간다. 물고기를 보며 떠올렸던, 그 깊고 깊은 바다로 조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보게 된 드넓은 세상과 홀로 만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랑의 힘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된 영화였다. 츠네오를 단순히 장애가 있는 소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떠난 남자로 보면 슬픈 영화지만, 츠네오는 조제를 위해 자신을 내어줬고, 그녀를 짐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짐은 내려놓지 못할 때가 짐일 뿐, 언젠가 떠날 날이 있음을, 그로 인해 고독해지는 날이 오게 될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애초에 서로를 얽어매는 그런 사랑은 없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맘껏 사랑하고, 떠나야 할 때는 마음을 다잡는 사랑, 그런 사랑이라서 아름답다. 다시 보고 싶다고 조제에게 질척거릴거라면 흘리지도 않았을 눈물을 츠네오가 펑펑 흘린다. 그것도 카나에를 만난 길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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