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여자의 인생 대부분이 결정지어지던 시절,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딱 들어맞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 불행하게 꼬여버린 두 여인의 인생에 비추어, 시대적으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라마를 소개한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시절
오래전 단막극들을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본다. 일부러 찾아보게 되는 작품들 중에는 이 작품,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도 있었다. 오래전 어르신들이 오스트리아를 '오지리'라고 부르는 걸 들어놔서 그나마 제목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유럽을 '구라파'로, 프랑스를 '불란서'로, 네덜란드를 '화란'으로. ('호주'는 지금도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더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미래의 어느 날에는 그 또한 이런 느낌일 수도..)
시작 부분에 캐리어를 끌고 오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외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던가 하며 드라마를 다시 보았는데, 그 오지리(오스트리아)와는 상관없이, 실재의 공간일 수도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는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게 제목이 기억에 콕 박혀 있던 탓일까, 삶의 애환과 서로에 대한 애증이 가득 깃든 드라마여서일까, 주연을 맡은 배우들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일까, 한번씩 찾아봐도 찾을 수 없더니만, 기다리던 보람이 있어서 일 년쯤 전에 이 단막극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은 공선옥 작가의 동명의 원작 소설(1993 출판)을 바탕으로 1994년 MBC베스트극장을 통해 방송됐다. 남주희, 최수지, 반효정, 윤동환, 임종국, 연운경, 김응석 등이 출연했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줄거리
이야기의 시작은 버스에서 내린 두 여인의 상봉에서부터다. 무심코 보다가 서로를 알아보고는 데면데면한 몇 마디를 건넨다. 불편한 듯 스쳐 지나가는 채옥(최수지). 그리고 그녀를 따라 걷는 은이(남주희), 둘은 고향 친구사이다.
채옥은 등에 아기를 업을 채 가방을 바리바리 든 모습이다(당시 책받침 여신 중 한 명 답게 지금 봐도 참 대단한 외모인데 아기 업은 모습이 어쩐지 더 가련해 보인다). 뭔가 복잡해져 가는 채옥의 얼굴을 뒤로하고 은이는 시댁을 향한다. 은이가 몹시도 못마땅해 보이는 시부모의 모습이 이어지고.
시간은 과거로 돌아간다. 학창 시절, 채옥을 좋아하는 상훈(윤동환)의 모습이 보여진다. 은이는 그런 상훈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한 채 그를 멀리서만 지켜본다. 어느 점심시간도 겹쳐진다. 초라한 은이의 도시락과 달리 채옥의 도시락은 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채옥은 도시락에 침을 뱉고 뚜껑을 덮어버린다. 새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와 안겨주고 간 도시락이라서다.
기억은 또 한 번의 점프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에 들어간 은이, 공부를 곧잘 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못 가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남동생이 와 있다. 은이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동생은 누군가와 함께다. 상훈이다.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지만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고통을 방관할 수 없던 상훈, 그는 학생운동을 하며 공장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원작자인 공선옥 작가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이기도 했다. (그 시절을 산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긴 하다.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은 노동현장에 참여해 일도 하면서 노동자들과 배움도 나누었다. 노동자들도 노동문학을 발전시켰다.)
은이 남동생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상훈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상훈은 그세 대학도 그만둔 상태.
"채옥아, 너는 분노해야 한다. 나의 이 값싼 동정에 대해서. 그리고 내 사랑의 허약함에 대해서."
상우는 그렇게 은이에게로 갔다. 자신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명분과 함께... 상훈의 말대로 사랑보다는 값싼 동정으로 한 결혼이었다는 점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시댁에 내려와 있지만 서슬 퍼런 시부모의 태도에 은이는 편치 않고, 채옥은 생활을 위해 아기를 데리고 새엄마네 식당에서 일을 돕고 있다. 어느 날 채옥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는 남자, 대학 동창 진우(김응석)다. 상우와 사랑에 빠진 채옥을 홀로 짝사랑하던 남자. 채옥은 어쩐지 그에게 기대고 싶은 듯하다.
기억에 남는 장면
-- 부뚜막 씬 1
부뚜막에서 은이와 채옥이 마주 앉아 있다. 채옥이 울고 있다. 아기를 빼앗기고 어미로서 흘리는 가슴 찢어지는 눈물이다. 그 위로, 은이가 "밥은 먹었니?"하고 묻는다. 속을 더 헤집고 마는 가슴 저린 멘트다.
"넌 지금 밥이 넘어갈 거라 생각하니?"
하며 쏘아붙이는 채옥의 한 마디. 아기를 되찾아오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채옥을 붙잡는 은이지만, 어찌 보면 은이가 채옥의 자리를 빼앗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공부를 암만 잘하면 뭘 해. 계집은 사내 한번 잘못 만나면 인생 끝인 거야."
그때 새엄마의 대사가 겹쳐져온다.
-- 부뚜막 씬 2
"들어와."
나지막이 은이를 부르는 채옥, 옆에 술을 두고 있다. 그녀가 은이를 보며 묻는다.
"넌 행복하니?"
사랑이 없는 결혼에 대해 은이가 털어놓는다. 처음의 감정대로였다면 절대로 안 했을 행동이었지만, 은이도 이곳에 내려와 볼 꼴 못볼 꼴 이미 다 보고 난 뒤다. 서로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시기할 필요 없었던 지난날에 대해 실토하는 두 사람.. 그때 하얗게 눈이 내린다.
-- 은이와 채옥의 이별 씬
"가니?"
"응. 너는?"
"나도."
...
"넌 어디로 가니?"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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