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문학관은 컨셉 자체가 문학작품을 극화한 것이기에 단막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많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보는 일이 더 즐겁다. 외장촌 기행도 그런 작품이다. 장을 떠도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어느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TV문학관 외촌장 기행, 80년대 길거리 풍경
TV문학관 - 외촌장 기행(1987)
원작: 김주영 - '외촌장 기행'
출연: 이종남(분옥), 김희라(장씨), 이성호(세철), 고희준(봉구), 김을동(동백집주인) 등
인트로에 봉고차 한 대가 등장한다.
차 안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다.
차를 운전하는 장씨와 조수석에 봉구, 그리고 뒤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분옥이다.
이 세 사람은 장터에서 공연을 하며 물건을 파는 떠돌이들이다.
이 작품은 원작인 김주영의 소설에서 많이 벗어나 각색되었다.
그래도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구성이 찰진 면이 있다.
분옥이 공연하는 뒤쪽으로 당시 사람들의 모습도 잡힌다.
풍경도 사람들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사람을 찾아 낯선 시골장터에 온 세철이다.
세철은 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있던 분옥의 모습을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만다.
취업사기를 당해 이른바 '그놈'을 찾고 있던 와중에, 얼굴에 화색이 도는 세철.
세철이 등장하는 도입부에서 장터씬이 꽤 오래 잡힌다.
장터도 오래전 기억 속의 모습 딱 그대로다.
이미 '분옥'이라는 여자의 그물에 걸려버린 이 남자.
여자만 보면 사시나무 떨듯 떠는 캐릭터인데, 어쩐지 분옥만큼은 편안하다.
술집 배경에 보이는 가격표도 새삼 놀랍다.
순대고기 일인분 2천원, 국밥 1,500원, 곱창1접시 2,500원...
이런데도 극중에서는 물가가 비싸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분옥이 세철에게 술 한 잔 사달라고 할 때 그를 벗겨먹는줄(?) 알았다.
그러나 분옥은 그렇게 독한 여자가 아니다.
사실 그녀는 함께 다니는 장씨만을 바라보는 순정파이기도 하다.
원래는 작부였는데, 떠돌이 장씨와 눈이 맞아 그를 따라다니는 중.
이리저리 팔려다니는 신세였던 그녀에게 자유를 준 남자.
그런 장씨는 그녀에게 가깝고도 때로 먼 남자다.
겨우 분옥의 몸값은 지불했지만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으니, 그와 살림을 차리고 싶은 분옥의 꿈은 늘 꿈일 뿐.
여차저차 이렇게 삼각 구도가 이뤄지고 만다.
자기 두고 도망간 분옥에게나, 데리고 떠난 세철에게 성질자랑 한 판 제대로 할 것만 같은 장씨.
그옆에서 분옥은 너네 맘대로 해라 하고 물러나 술만 마셔댄다.
장씨는 의외로 차분하다.
'난 잃을 게 없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잃는 게 많아.'
이런 식의, 수긍이 가면서도 명확한 언사만 이어갈 뿐.
결국 세철은 두 사람이 쓰는 옆방에서 하얀 밤을 보내게 된다.
여전히 분옥을 잊지 못하는 세철.
그녀를 찾아헤매다 결국은 만나게 되었는데, 예전과 달리 찬바람이 쌩 도는 분옥이다.
머물 방 한 칸 없이 떠돌이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분옥의 마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세철.
처음 분옥을 만났을 때 그녀가 그랬다.
"어떤 남자든 진짜 좋아하는 아가씨가 생기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든대요."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본 세철이 그녀를 향해 돌진한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이런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분옥의 역을 맛깔나게 소화한 이종남 배우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장씨 역할 김희라 배우의 괄괄한 연기도 새삼 눈여겨보게 되었다.
또 장씨라는 캐릭터의 무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겉으로는 대충 사는 인생 같은데, 헤아리기 힘든 우직함과 따뜻함이 있다.
또 하나, 이 작품이 좋았던 이유는 80년대 풍경이 오롯이 담겨서였다.
당시의 거리도, 사람들도 가감 없이 볼 수 있기에, 드라마를 넘어 하나의 소중한 기록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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