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문학관은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많아 그런지, 유독 급변하는 개화기 세상에 발맞춰 따라가지 못하고 고집으로 일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필묵장수'는 서예도구를 장마다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어느 떠돌이 화가의 이야기다.
TV문학관 필묵장수, 재능 없는 화가가 그린 역작
원작: 황순원
출연: 김순철, 김성원, 윤미라, 김일란 등
서화를 그리며 필묵을 팔러 전국을 떠도는 서노인은 이런 모습으로 장에 앉아 있다. 근처에서 약장수가 시끌벅적하게 공연 중이고, 바로 옆자리에서 목각품을 팔던 장사꾼은 오늘도 틀렸다며 툴툴거린다. 그와 함께 짐보따리를 챙겨 든 서노인은 갈 곳이 따로 있다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어디론지 향한다.
서노인은 십 년째 일 년에 두 번씩 해남에 있는 황부자댁을 찾는다. 떠돌이 그림쟁이인 자신을 너무도 융숭하게 대접해주는 황부자에게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준 것이 벌써 스무 번째다. 이제는 이 댁과 가족들이 모두 낯설지가 않아서 행여 눈을 감게 되면 이 마을에 묻히고 싶은 바람 때문에 주기적으로 황부자 댁을 찾는다. 죽게 되거든 흙이라도 덮어달라 이미 부탁도 해두었다.
서노인이 황부자에게 보답으로 남기고 간 그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잔재해 있는 '몰골법'이라는 전통 화풍으로 보인다. TV문학관은 내용을 떠나 이런 장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시 극으로 돌아와, 서노인이 주고 간 그림을 훑어보는 황부자의 입에서 뜻밖의 한 마디가 나온다.
"재주는 없는 사람이구만."
서노인이 어렸을 적에 그의 아버지는 다리를 저는 아들이 뭐라도 해먹고 살게 하려고 독선생까지 들여 서화를 배우게 했다. 김홍도 그림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정감 있는 장면이지만, 사실 서노인은 이때도 서화에 도통 싹이 보이질 않았다. 선생은 결국 이런 둔재는 살다 처음이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아들을 보며 착잡했을 아버지일 테지만 크게 노여워하기보다 뭔가 심란한 얼굴이다. 눈을 감기 전에야 아들의 손을 붙들고 속을 털어놓는 아버지, 애당초 서화를 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몸도 성치 않은 아이를 고생만 시켰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전답도 다 없애고.. 이 일을 어쩔 건가."
넉넉지도 않은 형편에 아들 교육시킨다고 독선생까지 붙였다가 재산이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에듀푸어'다. 서화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했는데 물려줄 건 없고, 눈을 감는 아버지도 여한이 많다. 서노인만큼이나 아버지도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눈을 감으며 당부한다. 서화는 그만두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런 아버지에게 그가 말한다.
"아버지의 소망대로 서화를 할 거예요."
아버지는 답답한 아들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숨을 거둔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청개구리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제 시간은 다시 그가 혼인을 했던 때로 흘러가 있다. 아버지의 소망대로 서화를 하며 살고 있는 서노인의 젊은 시절, 행색만 봐도 형편이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묵 장수로, 아내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 장에 팔며 근근이 살아간다. 필묵 봇짐도 무겁겠지만, 아내가 어깨에 진 지게도 만만치 않아 보여 안타깝다.
고개를 절레절레하던 아버지처럼, 아내도 그에게 서화를 그만두고 딴 도리를 하자고 말한다. 그런 아내를 모질게 때리고 집을 뛰쳐나와버리는 그다. 그 이후로 그의 방랑이 시작됐다. 중간에 집에도 들러보았지만 아내는 이미 사라지고 집은 폐가로 변해 있었다.
그런 그가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과수댁을 마음에 두게 된다. 고마운 마음에 그녀에게 그림 한 점을 남기는데, 과수댁도 그에게 손수 지은 버선 한 켤레를 건넨다. 아들 혼수에서 솜을 떼서 만든 '진솔 버선'을 서노인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고이 받아든다. 흠모하는 마음에 이 집 근처를 지날 때마다 들르고 싶지만, 그가 스스로를 타이르는 혼잣말이 참 착하다.
'(과수댁이 지나는 길에 들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찾는다는 건 따뜻한 성의를 미끼 삼는 짓이야. 그래선 안 되지.'
그나저나 고 김순철 님 눈빛, 명배우다. 애잔하게 녹아든 마음이 표정에서 바로 읽힌다.
여느 해처럼 황부자를 찾은 서노인, 평소와 마찬가지로 황부자네 가족은 그를 반기고 그는 황부자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서노인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 그림을 황부자에게 건네지 않고 허겁지겁 인사도 없이 자리를 뜬다. 도망쳐 나온 서노인이 이렇게 홀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떠도는 길에 서노인이 만나게 된, 예전 장에서의 그 목각쟁이다. 그는 이미 세상의 흐름에 올라탔다. 코로나19가 급습한 지금의 세상도 급변했지만, 작품에서 보는 이 시대는 지금보다 더 큰 격변기였음이 분명하다. 곧이어, 한국전쟁까지 발발하게 되는 어수선한 시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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