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차탁에 숙우까지 꺼내 차를 마신다. 예전에는 기꺼이 즐겨하던 수고였는데, 언젠가부터 일인용 다기나 텀블러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번에 새 차를 개봉하면서 새 맘으로 수납장에서 놀던 다구들을 꺼내서 차를 만들어 보았다.
차를 우리는 다관과 찻잔, 그리고 숙우, 차를 뜨는 용도의 차칙이다. 찻물의 온도가 너무 뜨거우면 쓴 맛이 강해지기 때문에 물을 적당히 식혀서 쓰기 위해 숙우를 사용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굳이 다도를 다 지킬 필요는 없겠지만, 차 맛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물의 온도를 적당히 해주고, 차를 마실 그릇들을 데워서 사용하는 게 좋다.
그릇들을 데우기 위해 숙우를 활용하게 되는데, 뜨거운 물을 일단 숙우에 부었다가 이 물을 다시 빈 다관에 부어준다. 다관은 아직 차를 넣기 전이다. 다관이 데워지면 이 물을 또 찻잔에 나눠 담아준다. 찻잔도 데워지고 나면 물을 다시 숙우에다 붓는다. 숙우의 물이 다관으로 갔다가 찻잔으로 갔다가 다시 숙우로 돌아오는 동안, 그릇들을 모두 데워주기도 하고 그 속에 있던 물의 온도도 찻물에 사용하기 좋게 적당히 식어간다.
이제 다관에 차를 넣고 숙우에 있던 물을 다관에다 부어 차를 우려낸다. 숙우가 비었으므로 뜨거운 새 물을 숙우에 채워둔다. 그래야 알맞게 식은 물을 다관에 바로바로 채울 수 있다.
첫 잔을 따르고 숙우에 있던 물을 다시 다관에 채워주었다. 한 잔은 세 모금 정도 마시면 바닥이 나므로, 찻잔에 차를 따르자마자 다관에다 새 물을 넣어줘야 다음 잔을 연달아 마실 수 있다.
진짜 차 맛은 두 번째 잔에서 느낄 수 있다. 첫 잔은 살짝 밍밍한 감이 있다. 세 번 정도 차를 우리고 나면 찻잎은 일단 차로서는 수명을 다 하는데, 이를 잘 말려서 차떡을 만들면 이 또한 별미 중에 별미라 차를 100% 다 활용하게 된다. 이런 수고도 한 지가 꽤 되었다.
내가 마시는 차는 '오설록'의 세작이다. 차 맛이 가장 좋다는 곡우 즈음에 딴 어린 찻잎을 말린 것으로, '오설록'은 아모레퍼시픽의 차 브랜드다. 화장품 회사에서 웬 차인가 싶을지 모르지만, 제품설명서에 보면 이 회사가 차 사업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아쉬워하는 오너의 기업정신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지금의 다도 또한 일본 다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고 일본이고 자신들만의 차 문화가 있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좀 미지수다.
사라져 가는 우리 차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차 사업을 끝까지 고집하고, 차를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노력하는 아모레퍼시픽의 정신에 경외감이 든다. 차의 품질도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다.
차는 한 잔 꿀꺽 삼키고 마는 물 한 잔이 아니다. 내주는 이의 정성이 들어가고, 마시는 이의 감사함이 들어간다. 그래서 다도(茶道)라는 말 자체에 '道'라는 한자가 사용되는데, 이런 문화가 있다가 사라졌으니, 차를 즐기는 사람으로서도 정말 아쉽다. 그나마 차에 관해 연구하고 명맥을 이어나가는 아모레퍼시픽 같은 기업이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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