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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보..

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반드시 적인 것만은 아니다.

by 비르케 2009.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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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중국인 이야기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초면에 제게 무례한 질문을 던져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여과되지 않은 반감을 그대로 드러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였지요. (관련글: 어느 중국인이 내게 던진 황당질문)

그집 아이와 제 큰애가 이제는 반도 다르고, 끝나는 시각도 다른데다, 더 이상 학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 않아도 애들이 저희들끼리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니 그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 일이 어디 그런가요, 큰애 캠프를 보내며 다시 그 가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캠프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이 도시 아이들뿐이 아니라서, 버스는 뮌헨을 출발해 이 도시 저 도시를 두루 거쳐 오다 예정시각보다 한 시간 이상이 지연되었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은 맘에 맞는 친구들끼리 어울려 달리기도 하며 잘 놀고 있었지만, 부모들은 다들 상당히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요.
 
선뜻 말을 걸던 지난번과는 달리 중국인 부부도 제게 말을 걸지 않았고, 저도 인사만 했을 뿐, 오히려 잘 됐다 여기면서 그들이 바로 옆에 있어도(한 버스를 타도 아이들의 목적지가 서로 조금씩 달라서 목적지가 같은 아이들끼리 모여있으라 하여 옆에 있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길 떠날 자기 딸래미의 모습을 찍느라 한참동안 거의 쉴새없이 셔터만 눌러대고 있더군요.

드디어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작별인사, 여기저기서의 뽀뽀, 부모들의 나직한 단속의 말들...
캠프 떠나는 모습을 다들 찍어대는 와중에, 그날따라 하필 카메라를 깜박하고 챙기지 못한 저 스스로를 책망하며 서있다 보니, 남들보다 유별난 그 중국인 부부의 셔터질에 유독 더 눈길이 가더군요. 그들은 버스에까지 올라가 기어이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내려온 다음, 그걸로도 부족해서 버스밖에서 그 누구보다 더 크게 몇번에 걸쳐 작별인사를 외치고, 연신 손바닥에 '쪽'소리가 나는 키스를 해서 아이에게 날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유별나다고 한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표현일진대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습니까. 한번 감정이 상했던 적이 있던 제 눈으로 본 것이기에 그들의 모습이 더욱 껄끄럽게 다가왔던 것이었겠지요.    

어쨌든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지만, 그로부터 3주 후, 아이들이 캠프에서 돌아오던 날 또 다시 그들의 얼굴을 대해야 했습니다. 3주 전과 마찬가지로 인사말만 건네고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8시에 도착하기로 한 버스가 이번에도 밤 10시를 넘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씨마저 갑자기 추워져서 제 옆에 있던 작은애가 오들오들 떨더군요. 애들을 마중와 기다리고 있던 부모들도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순식간에 다들 자신이 몰고온 차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부모들이 하나 둘 어딜 가는건가 했어요.ㅜㅜ), 그 자리에는 몇명만이 갑작스런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서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더군요.

"춥지 않아요?"
돌아보니 그 중국인 남자였습니다. 추워도 그 사람에게는 춥다고 하기 싫더라구요.  
"괜찮아요."
그러자 그도 그다지 부드럽지는 않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옷 필요하지 않아요?"
"정말 괜찮아요. 버스도 금방 올테니 걱정 마세요."
그는 이번에는 조금 더 날카로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애는 안 괜찮아요!"

그러더니 자신의 점퍼를 벗어줘야 하나 머뭇거리더군요.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얼른 막아서더니 자신의 점퍼를 벗고는, 다시 그 안에 입고 있던 스웨터를 흔쾌히 벗더군요. (그녀는 독일어를 못해서 다른 사람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오히려 사정하는 표정으로 저를 한번 바라보다, 제 아이의 머리에 얼른 스웨터를 끼워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커다란 옷을 원피스처럼 치렁하게 걸치고 있는 작은애가 귀엽다는 양, 몇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부모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자기와는 반목을 하더라도 자기 자식에게 잘해주면 그것만으로 너무 감사해지는... 그날 그 중국인 부부가 갑작스레 너무도 고마워졌습니다. 그래서 버스가 오기까지 대화도 나누고, 묵은 감정들은 그냥 바람처럼 휙~ 날려버리기로 결심하게 되었지요.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해 아이들이 내리고, 그 중국인 부부의 셔터질은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떠나던 날과 똑같이 이어졌습니다. 큰애가 여행 떠나던 날 카메라를 챙기지 못해 맘속으로 많이 아쉬워했던 저는 그날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챙기지 못 했습니다. 정신을 어디에 놓고 사는 것인지......

그 중국인 부부가 저희 아들과 자신의 딸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와중에, '그 사진 제게도 보내줄 수 있나요?'하는 소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만 하고 있었지요.
그때 마침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그 중국인 남자가 제게 묻더군요. 
"가족끼리 사진 한 장 찍어줄까요?" 
앗, 이렇게 고마울 수가... 오랜만에 얼굴을 본 큰애와 신이 난 작은애를 안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는 사진을 보내주겠노라며 이메일 주소를 묻더군요. 알려주고 나서 그를 향해 이렇게 덛붙였습니다. 
"매번 카메라를 못 챙겨서 속상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사진이라도 찍게 되어서 다행이예요."

그리고 며칠 후, 그 중국인 부부에게서 메일로 사진을 받았습니다. 밤이라 잘 나왔다고는 할 수 없는 사진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날 큰애를 안고 들떠있는 제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으니 값진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사진 속의 저는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듯, 오랜만에 만난 큰애를 안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도 내고, 야단도 치는, 가끔은 표독스런 엄마로 다시 돌아와 있지만요.

사진과 함께, 중국인 부부는 자기 딸래미의 블로그 주소를 적어두었더군요. 필요한 사진이 있으면 더 가져가도 된다고 하면서요. 마음을 여니 너그럽기 그지없는 그들입니다. 그들의 딸래미 블로그에 들어가 <출발하던 날 버스 사진(위)>만 가져왔지만, 아쉬운대로 버스만 보고도 그날의 감흥은 느껴졌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친절하게 감사의 인사를 메일로 보내고 나서, 이제 저도 그들에 대한 미움을 모두 접기로 했습니다. 사진속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반목했던 어른들의 모습이 부끄럽단 생각도 들었구요. 적으로 보이는 누군가도 알고 보면 마음 따뜻한 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케 한 사건이었습니다. '개고기'이야기는 분명 기분 나쁜 것이었지만, 사람은 누구든 살면서 부지불식간에 수없이 많은 말실수를 범하며 살아가니까요. 예전 일은 잊고, 이제부터는 기분좋은 미소로 그들을 대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자주 마주칠지는 모를 일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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