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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by 비르케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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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1948년생 작가가 오래전에 쓴 이 작품.. 거듭된 복간으로 인해 일명 '불사조 미스터리'로 불리는 '7인 1역'을 내심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지난번 렌조 미키히코의 또 다른 작품 '백광'을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백광'도, '7인 1역'도 모두 하나의 정황을 두고 다수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희생자를 둘러싸고, 용의자들 모두는 그 희생자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7인 1역

7인 1역이라.. 연극이나 드라마에서 '1인 1역'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의미다. 당연히 1인 2역이라면 한 사람이 두 인물을 연기할 때를 지칭한다. 그러면 7인 1역이라는 말은 일곱 사람이 한 사람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의 정체는 가려져 있기 마련이다. 이런 미스터리 소설에서 범인을 보여주며 회상식으로 전개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누군가' 또는 '아무개'로 불릴 수밖에 없는 불특정인이 등장한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 중인 모델, 미오리 레이코의 1인칭 시점으로 이 소설의 서술은 시작된다. 그녀의 집에, 위에서 말한 불특정인, '누군가'가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누군가를 향해 자신을 없애줄 것을 종용한다. 그동안 자신의 협박을 받고 있던 상대에게, 지금의 기회를 날려버리면 후회할 거란 뉘앙스를 한껏 풍기는 그녀.

 

 

미적거리는 상대를 향해, 당신은 소심해서 절대로 못 할 거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상대 입장에서는 미오리 레이코의 목줄에 걸린 듯 그녀에게 단서를 잡힌 채 몇 달 동안 협박에 시달려온 데다, 늘상 그런 빈정거림에 지칠 법도 하다. 그러니 레이코의 부추김에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미오리 레이코는 상대의 알리바이까지 조작해 주며 죽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사람은 파란색 크레용을 움켜쥐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도벽이 있던 어떤 친구가 자신의 전리품을 자랑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넌 겁쟁이라 이런 거 못하지?"

 

마침내 친구에게 떠밀려 문구점에 들어간 그녀는 보란 듯 파란색 크레용 하나를 훔쳤다. 하지만 기껏 그걸 훔쳤느냐는 듯 코웃음 치는 친구에게 화가 나, 순간 친구의 얼굴에 파란색 크레용을 내리그어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여섯 살 그녀처럼, 지금 그녀 앞에 마주한 상대 또한 파란 크레용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오 년 동안 낯선 거리를 헤집고 다녔으나 이제는 단 한 걸음도.

 

뭐 이렇게까지 죽고 싶은 사람이 있나, 미스터리 소설에서의 트릭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죽고 만다. 오 년 동안 온 세상을 떠돌며 스팟라이트를 한 몸에 받던 잘 나가던 모델은 그렇게 자신이 자초한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이 사건은 7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범인 찾기에 나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미스터리한 죽음을 초래한 미오리 레이코가 진정 원했던 것이 범인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일 리 없다. 그녀에게 '누군가'로 지칭되는 그들 7인 모두는 이미 모두가 범인이었던 것. 그들은 레이코 그녀를 바닥 끝까지 추락하게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그녀가 복수를 다짐할 만큼의 동기가 있었나 의문이 드는 인물도 있었지만, 작중 주인공인 레이코는 자신을 파멸시킨 이들을 향해 그들의 근간 또한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복잡한 장치들을 마련한다. 다만 그녀의 생각처럼 그 장치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 

 

 

그녀에게 있어 7인은 그가 누구든 간에 파멸시키고자 하는 '누군가'일 뿐이고, 그녀에게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내맡기고 있는 연약한 인간들일 뿐이다. 미오리 레이코는 끝까지 그들의 고통을 원했다. 한때 자신에게 군림했던 자들의 목줄을 언제까지고 조였다 풀었다 하며 즐기고 싶었던 것이 그녀의 본심이었던 듯하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한없이 큰 약점이면서도 때로는 그로 인해 가장 큰 파워를 갖게 되기도 하나 보다. 죽는단 사람, 죽어도 괜찮다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세상에 과연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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