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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도리스 레싱, 자신만의 시간을 꿈꾸는 여성들

by 비르케 202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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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혼자 살고 싶다고 말하는 중년 여성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냥 하는 소린가 할 정도로 편하게 툭 던지는 한 마디였다.
그런데 그중에는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19호실로 가다-도리스 레싱, 자신만의 시간을 꿈꾸는 여성들

 

가족을 위해 오랜 세월 내어주는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 이제는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 한다.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자기 혼자만의 삶을 고민하며 인생의 한가운데 자기 자신을 놓고 싶은 것이다. 결코 가족이 싫어서가 아니다. 가족에게 내줄 만큼 내주었으니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다. 집안에는 그녀들의 공간이 없다. 설령 있더라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쓰기는 쉽지가 않다. 

 

집에서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매분 매시간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가족 구성원 누군가에 의해 필요시 되는 순간이 잦다. 양말, 셔츠 같은 사소한 물건들의 행방을 찾아 건네기 위해 단 1분을 소비하더라도 그것이 몇 번 반복되면 자신의 시간은 다 날아가고 만다.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어느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나머지 그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던져주고는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19호실로 가다'를 떠올렸다.

 

 

 

'19호실로 가다'는 도리스 레싱이라는 여성작가의 1960년대 작품이다. 1919년 태생이니,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있던 해,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작가가 태어났다. 오래된 작품이라 지금과는 다른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작품을 읽다 보면 지금의 여성들이 생각하는 부분과 너무도 맞아떨어져, 이 작품이 1960년대에 나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19호실로 가다-도리스 레싱-중년 여성들이 원하는 자신의 삶

 

'롤링스 부부의 이 이야기는 지성의 실패였다'는 전제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인 수전과 그의 남편 매슈는 20대 후반에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늦은 결혼이었다. 신문사 차장급 기자와 상업미술에 재능 있는 광고회사 직원으로 잘 나가던 두 사람이 결합했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이상적인 삶을 꿈꿨다.

 

서로가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아파트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마치 지는 것처럼 여겨져 새 아파트를 마련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정도로 능력 있고 자존심 강한 두 사람이었다. 생활이 안정되면 주택을 구입해 아이를 낳자고 했던 계획도 곧 이뤄졌다. 이때부터다. 두 사람의 삶이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아진 것은.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수전이 다시 일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리치먼드에 정원 딸린 하얀 주택에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자신이 손수 기를 생각을 한다. 일은 언제라도 원하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서 문제를 발견한다. 아이들 모두가 학교에 가게 되면 자기 시간이 많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일곱 시간 동안 자신만의 시간에 결코 몰두할 수 없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침실보다 그 방이 훨씬 더 갑갑했다. 

 

자신만의 시간을 원했던 수전은 남편과 상의끝에 꼭대기 방에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기로 한다. 방문 앞에는 "개인 시간! 방해하지 말 것!"이라는 메모도 붙였다. 그러나 이렇게 집 안에다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가족의 이해를 구해야만 한다는 데 놀란다.

 

아이들은 엄마의 공간을 이해해 주었지만, 정원에서 커튼이 내려진 엄마의 공간을 올려다보거나 무심코 계단을 뛰어올라왔다가 살금살금 내려가기도 한다. 사실 현실에서는 아이들이 이 정도 배려만 해줘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수전의 공간은 결국 오픈되고 만다. 그저 또 하나의 가족실이 생겨난 것이다. 

 

 

 

걸어야 하는 전화와 기다려야 하는 전화가 그녀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웨일즈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 그녀, 그런데 여행지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그녀다. 가정부에게 할 일을 일러줘야 했고, 저녁마다 아이들이랑, 또 남편이랑 통화를 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부재에도 최소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녀는 진정으로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궁한 대로 그런 공간을 찾아냈다.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호텔방 19호실이었다. 방은 끔찍했다. 하나뿐인 창문에, 문직 커튼에, 작은 침대에는 싸구려 이불이 덮여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느꼈다.

 

한때 광고회사에 다녔던, 아이들을 기르고 나서 아무 때나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유능한 여성은 이제 이런 비용마저도 남편에게 부탁해야만 쓸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니 훌륭한 집에 살고 있는 그녀지만 비싼 호텔에는 갈 수가 없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력단절녀(경단녀)인데, 그때의 경단녀는 지금과 달리 방법이 없었을 듯하다. 다행히도 남편은 돈을 주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런 남편의 태도가 마치 돈을 주고 치워버리는 듯해서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완벽하다 여겼던 결혼과 그에 맞춰 만들어진 멀쩡한 것 같던 삶의 본질은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에 의해 침해당한다. 싸구려 호텔, 이름 모를 남녀가 뒤엉키다 나간 작은 방에서 찾던 그녀의 소소한 행복은 남편의 뒷조사와 추잡한 상상으로 다시 한번 얼룩진다. 그리고 그 상상은 마침내 이제까지의 삶의 균형마저 흔들어버린다.

 

 

 

 

도리스 레싱의 이 소설은 새드엔딩이다.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볼 때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 속에서 일궈 올린 중산층의 부로 인해 더 이상 엄숙주의는 미덕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고도성장기를 떠올려봐도 지금 같은 침체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현란함이 존재했다.

 

그것은 뜻밖에도 도리스 레싱의 소설 근간에 깔려 있는 비정상적인 '성'과도 연관된다. 어쩌면 그것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접하는 '밀실'의 느낌과도 같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고 폐쇄되어 있지만 그 실체는 적나라하고 속부터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엄마의 삶을 살았던 중년 여성들이 꿈꾸는 혼자만의 시간은 많은 것을 내포하지 않는다.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절실할 뿐이다. 지금의 안정된 삶과 바꿔서라도 혼자만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나 허영이라고 어찌 단언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옹기종기 단란한 가정을 인생의 완성으로 여기는 대부분의 중년 남성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치닿는다. 그런데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오래전에 무심하게 읽었던 '19호실로 가다'라는 이 소설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격하게 공감하게 되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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